셀프 진로 상담

가끔씩 머리속에 떠오르는 축복이자 오만한 생각이 있다. “얼마를 주면 재미없는 일도 할 수 있을까?” 일단은 현재하고 있는 일은 재밌다는거니 축복이라고 할 수 있고, 돈 많이 주면서 나를 재미없는 일을 시킬 사람이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이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나한테 당장 연봉 두 배를 줄 회사는 없을테니 내가 현실적으로 오퍼를 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상한선은 현재 받는 돈에서 20-30K 정도 오른 금액일 것이다. 이만큼 준다고 하면 회사를 옮길까?

이제 업계에 들어온 지 4년정도 되서 간신히 초짜 티는 벗었지만, 대충 senior scientist 자리를 지원할만한 경력은 됐다. 그래서인지 종종 헤드헌터나 지인으로부터 지원해 보겠냐는 문의가 들어오곤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 헤드헌터에게 계속 연락을 받으면서 헤드헌터의 본분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지시켜줘서 자신도 꽤 쓸만한 사람이구나라는 (많은 경우) 헛된 믿음을 심어줘서 모두의 멘탈을 고양 시키는데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업계인 모두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각 회사가 헤드헌터들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무차별적으로 연락을 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몇 군데 인터뷰를 해보고 회사 탐색도 해봤다. 그런데 채용 과정에서 오퍼를 받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이게 지인들을 귀찮게 하는 일이라 인터뷰만 보고 멈췄다. 사람 구하기도 힘들다면서 연봉 적혀 있는 오퍼부터 적어주고 사람을 뽑아야 하는거 아니야? 얼마를 줄지를 알아야 내 지인들을 귀찮게 할지말지를 정하지. 사실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지인을 귀찮게 해서라도 추천서를 받아낼만큼 옮길 의지가 있는 사람을 더 뽑고 싶어할테니 딱히 잘못된 프로세스라고는 할 수 없다. 결국 얼마를 줄지 모르는 상태로는 지인들을 괴롭힐만큼 내가 간절하지가 않았던거지. 그래도 한 회사에서는 얼핏 연봉을 이야기해줘서 만약에 지원해서 붙는다면 현재보다 최소한 20K는 더 받을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진행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정도 더 주는걸로는 안 옮기겠다는 것이다. 왜?

일단 둘이 살기 때문에 지금 연봉으로도 401(k)를 맥스로 채우고 손익 분기점은 맞출 수가 있다. 그러니까 옮기지 않는다고 통장잔고가 계속 내려가거나 손가락만 빨아야하는 다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지금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들이 꽤나 흥미롭고 배울 것도 많다. 물론 게을러서 아직까지는 내가 잘하는 분야에 안주하고 있지만 여길 나가기 전에 꼭 배워야하는 기술들이 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이다. 내 목표는 ‘흥미로운 실험을 할 수 있으면서 밥 먹을 수 있을만큼 돈 벌기’ 이다. 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도달해야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게 더 중요하다. 게다가 말이 무척 잘 통하는 똑똑한 CEO랑 일을하는 것도 즐겁다. 나는 머리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서 이 회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외에 쓸때 없는 장점도 많다. CEO랑 co-founder가 게임을 좋아해서 매주 happy hour에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물론 한 시간짜리 짧은 보드게임으로는 별로 성에 차진 않지만 그래도 같은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건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 들어왔을 때 내가 꿈꿔봤던걸 이 회사는 (아직 한참 멀었지만) 해보겠다고 목표는 세워두고 있다. 이게 과연 매년 최소 2만불을 포기하면서 할만한 일일까? 사실 아닐 수도 있다. 난 의외로 흥미에 대한 역치가 낮아서 일견 지루해 보이는 반복 실험도 무척 즐겁게 한다 – 아니 사실은 반복 실험이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일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실험을 한 후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건 ‘이게 과연 재현 가능할까?’이다 – 사실 재현 잘 안된다.

다른데서도 비슷한 흥미로운 실험을 할 수 있으면 왜 안 옮길까? 사실 사원 넘버 이십 몇 번이 (그런걸 매기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회사의 성과를 얼마나 나눠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스타트업에 들어 왔으니 회사가 성공하는걸 보고 싶기도 하고 버려야 하는 스탁옵션이 아깝기도 하다. Loss aversion bias에 가깝겠지만 (보통 스탑옵션을 버리고 옮기면 그만큼 준다고 하니…) 어쨌든 당장은 큰 일이 없으면 회사가 상장할 때까지 존버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사장님 날 놓치고 싶지 않으면 월급 좀 올려주세요!

정리 정돈 잘하기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항상 마무리를 잘 짓는게 어렵다. 대부분의 샘플들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고, 각자 레이블을 하는 방식도 다르다. 많은 경우에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약어로 레이블을 하기 때문에 – 수 많은 샘플을 레이블하기도 귀찮고 튜브가 작아서 써 놓을 수 있는 공간도 많지 않다 – 설사 남겨놓고 떠난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이게 무슨 샘플인지 알아볼 방법이 거의 없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 랩 사람들 대부분 모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리 레이블을 잘 해놓고 따로 파일을 만들어서 이게 무슨 샘플이라고 자세하게 적어놔도 그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면 찾아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1.이 샘플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느냐? 2.이걸 누군가 다시 꺼내서 쓸 일이 있느냐? 3.다시 만들 수 있느냐? 였다.

사실 처음 석사 마치고 유학 나올 때는 너무 바쁘기도 했고 (사실 마무리할 때는 항상 바쁘기 때문에 여유 있게 정리하고 나오기가 쉽진 않다), 무엇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든 쓰겠지 라고 생각하고 대충 그 자리에 다 두고 나왔다. 그러다가 박사를 하면서 그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 샘플이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 알아보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고 박사를 졸업하면서는 내 논문에 실렸던 샘플들과 남들도 사용하는 Primer와 몇몇 Plasmid를 제외하고는 몽땅 다 버렸다. 다행히(?) 교수님이 정리정돈을 잘하고 가야한다고 여러번 압박을 주셔서 남겨놓은 샘플들을 엑셀 파일로 만들어서 무엇인지 설명도 해 놓고, 내 엉망인 글씨를 읽어야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 튜브에 원래 쓰여 있는 글씨를 메탄올로 지우고 새로 (내 기준에서는) 또박또박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어쨌든 내가 논문을 작성할 때 사용한 샘플들은 그 존재가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남겨놓고 가긴 했는데 사실 위에 적어놓은 기준 2와 3에 따르면 과연 이걸 남겨 놓을 필요가 있었나 싶은 것들이 많았다. 만드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cell line들은 내가 많들어 놓은걸 사용하는게 의미가 있지만, 그 외에 만드는데 1, 2주 정도가 걸리는 RNA, protein 샘플들은 굳이 이걸 누가 다시 쓸까 싶었다. 보통 오래된 샘플들을 다시 꺼내서 실험하는 경우에 찝찝해 하는 경우가 많다 – 심지어 내가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샘플을 내가 다시 쓰는 것도 가끔 꺼림칙하다. 혹시나 써서 실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혹시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가 안나오면 샘플이 오래된 탓을 하고서 다시 실험을한다. 여기서 웃긴건 오래된 샘플을 써서 실험한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면 샘플이 잘 보존됐다고 생각한다. 단 한번이라도 오래된 샘플이 찝찝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오래된 샘플은 그냥 버려야한다.

샘플들은 나름 열심히 버리고 필요한건 정리를 잘해놨는데 문제는 컴퓨터 파일을 제대로 정리를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나가면 내 컴퓨터에 접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못하고 파일들은 그냥 컴퓨터에 놔두고 나왔는데 그것 때문에 대참사가 일어났다. 내가 꽤 기여를 많이 했을 수도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제1 저자가 내가 만들어 놓은 컴퓨터 원본 파일을 내 컴퓨터에서 꺼낼 수가 없었고 결국 그 데이터를 사용할 수가 없어서 논문에서 이름이 빠졌다 ㅠ.ㅠ

회사에서 나올 때는 조금 더 과감하게 진행했다. 나만 사용하던 enzyme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고 사실 다른 사람들이 쓰려면 쓸 수도 있었는데 다 버렸다. 원래 처음에 회사 들어올 때 이곳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내가 그 시스템을 따라가기만 하면 정리가 매우 잘 될 줄 알았는데, 실제로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물품들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지만, 직접적으로 상품과 관련이 없는 연구에 대해서는 학교랑 거의 비슷하게 개인들이 알아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비슷한 enzyme인데 다른 브랜드의 제품들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거기다가 내가 산 enzyme까지 추가하고 싶지 않아서 다 버렸다. 게다가 회사가 돈이 많다보니까 사람들이 inventory에 뭐가 있나 열심히 찾기보다는 그냥 새로 사는걸 선호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회사에서 나는 랩의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연구를 하다보니까 누가 새로운 사람이 와서 내가 하던 연구를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 필요 없는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를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심지어 새것도 뜯어서 다 갖다버렸다. 회사에서는 내가 그렇게 많이 버린 줄 모를테니까 아마 나한테 감사하진 않겠지만 그냥 다 놔뒀다면 언젠가 정리를 하면서 ‘대체 이걸 어디다 쓰는거야?’, ‘언제적 물건이 아직도 남아 있는거지?’ 하면서 남겨놓은 사람한테 욕을 한바탕 퍼부었을 것은 분명하다.

박사 때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남아도는 외장하드를 하나 가져다가 파일들도 몽땅 옮겨놨다. 사실 내가 회사에서 남겨야 하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고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막판까지 실험에 매달리느라 보고서는 거의 작성하질 못했고 draft만 대충 작성해서 넘겼는데 아마 디렉터가 내 보고서를 열어봤다면 그동안 쌓아놨던 좋은 관계가 몽땅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한다. 그래도 내가 실험했던 결과들은 각종 미팅에서 발표한 자료들에 남아있으니까 좀 봐주지 않을까 ㅠ.ㅠ 그리고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일단 명확한 결과가 머리속에 박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결과를 도출하게 만든 세세한 데이터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보고서는 덜 중요하지 않을까…

항상 새로운 랩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면 전보다는 좀 더 정리를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지금 시작하는 곳이 스타트업이다보니 학교처럼 모든 개인이 샘플을 각자 정리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나만 혼자 정리하는 시스템을 잘 갖춰놔봤자 티도 안날텐데 꼰대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시스템을 정립하자고 해야하나, 아니면 편하게 묻어가면서 각자 알아서 정리하게 놔둬야 하나 고민이된다.

정규직 찾기

현재 있는 직장에서는 올해 9월까지 계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계약이 끝나기전에는 직장을 잡아야했다. 물론 지금 직장에서 계약을 1년 연장할 수 있지만, 굳이 연봉도 낮은 포닥 생활을 더 오래하고 싶지 않아서 매니저에게 올해 3월부터 직장을 알아보겠다고 이야기를 했고 매니저도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고지식하게 3월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indeed.com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linkedin을 통해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과 같은 일을 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서 혹시 아는 사람 없냐는 연락이 왔다. 어? 나 지금 직장을 찾고 있는데? 우리 그룹에서 이 회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길래 혹시 이 회사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 너 지금 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어? 난 너 다른 일 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지.’ 응? 내가 뭘 하고 싶다고 이야기 한적이 없는데? 나도 내가 뭐 하고 싶은지 모르는데 저 사람은 내가 다른거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아는거지? 내가 회사에서 월급 루팡하던게 들킨건가. 어쨌든 다른 회사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 물어봤더니 거기 갈거면 우리 회사에 남으라면서 뜬금없이 정직원 오퍼가 날라왔다. 고작 3일을 주고 고르란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일단 거절을하고 여전히 3월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뜬금없이 꽤 큰 회사에서 또 연락이 왔다. 무려 senior scientist 자리라면서 전화 인터뷰를 하자는거였다. 게다가 위치도 캠브리지라서 내가 가고 싶은곳이라 잘됐다고 생각하고 인터뷰를 했다. 처음에는 senior scientist 자리라고 해서 인터뷰를 했는데, 정작 전화를 하니까 나는 경력이 짧다면서 scientist 자리를 주겠다는데서 일단 기분이 약간 상했다. 결국 senior scientist가 필요해서 포스팅을 한건데 나를 그 자리에 앉히고 scientist를 주면 하는 일은 비슷하게 하면서 더 싸게 부려먹겠다는거잖아? 게다가 인터뷰를 하면서 그 그룹에 대해서 들었는데 일단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일을 하기에는 인원이 좀 적어보였다. 물론 automation이 좀 더 잘되어 있으면 인원이 크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인원이 적다는건 성장하고 있는 그룹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난 research가 좀 하고 싶었는데 그 그룹에 들어가면 빼도박도 못하고 정해진 일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하는 development에 몸을 담아야하는 것 같았다. 지금 있는 그룹도 development를 메인으로 하고 있지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research도 같이 진행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그렇게 작아서야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보였다. 문제는 내가 주제 넘게 저런 이야기들을 인터뷰하면서 열심히 토로를 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실수를 깨달아서 ‘저는 작은 그룹도 좋아해요~’라고 어필을 해봤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며칠후에 탈락했다는 통보가 왔다. 내가 지원을 한적도 없고 자기들이 먼저 인터뷰 하자고 했으면서 탈락시키다니 왠지 찝찝했다.

그리고 드디어 3월이 왔다! 그동안 월급루팡 하면서 레쥬메를 열심히 고쳐놨기 때문에 3월 땡치자마자 지원을 했다. 처음 지원한 회사는 캠브리지에 있는 스타트업이었다. 사실 이 회사는 indeed.com에서 전혀 검색도 되지 않았었는데, 예전에 우리 그룹으로 자기들 제품 팔려고 발표를 하러 온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세포 엔지니어링을 하는 회사인데 machine learning을 통해서 최적화를 한다고 해서 나 혼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발표를 들었었는데, 우리 그룹에서는 이게 뭔지 이해를 전혀 못해서인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회사였다. 그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잡 포스팅이 있었고 마침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길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원을 했다.

회사에서 올라오는 직업 포스팅을 보면 사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는게, 대부분 기존에 갖고 있던 ‘경험’ 위주로 사람을 뽑는다. 사실 난 생물학자를 뽑기로 결정했다면 경험보다는 얼마나 깊게 사고를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물학 실험은 다 거기서 거기이고, 설사 처음하는거라도 박사급 정도 되는 인력이라면 배우는데 크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게다가 어차피 뽑아 놓고 처음부터 일하라고 던져주지도 않고 결국은 자기들의 프로토콜에 맞춰서 새로 교육을 시킨다. 그럴거면 차라리 다른 분야의 경험을 쌓았던 사람이 들어와서 그 분야를 배우면 자기가 원래배웠던 것도 이 분야에 적용을 시켜볼 수도 있고,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늘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깊게 사고한다는건 사실 레쥬메 상이나 인터뷰로 알아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주로 같은 일을 해봤던 사람 위주로 뽑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스타트업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경험을 원했고, 이런 일을 해봤던 사람을 드물었기 때문에 레쥬메를 올리자마자 폰 인터뷰 요청이 왔다.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CEO랑 직접 통화를 했는데 이야기가 술술 잘 풀려서 전화 통화하는 와중에 on site 인터뷰 날짜를 바로 잡았다. 이럴수가!! 내가 지금 직장을 잡기 위해서 100군데 지원하고 고작 on site 인터뷰는 지금 회사 하나 받았는데, 이번에는 고작 1개 지원해서 인터뷰 오퍼를 받아냈다. Industry에 한 번 발을 담그면 그 다음부터는 이직이 쉽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건 치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쉬웠다.

그런데 정작 발표를 하러 가자니 거기서부터 난관이었다. 보통 이직을 하게 되면 현재 있는 회사에 알리지 않고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었는데, 나는 현재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인터뷰할 회사에 발표를 해야하기 때문에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발표 승인을 받아야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인터뷰를 한다고 털어놓고 발표 자료를 만들었는데 변호사들이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서 발표 전날에서야 간신히 PPT자료를 승인을 받았다. 몰래 옮겨야 되면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발표를 하는거지? 그냥 몰래 발표 하는건가?

On site 인터뷰는 평범했다. 작은 회사다보니 CEO가 자기 회사의 비전에 대해서 나에게 소개를 하고, 내가 1시간 정도 발표를 했다. 그 다음에 점심은 machine learning을 하는 computer scientist들과 같이 먹었는데 배경이 전혀 다르다보니 대화를 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리고는 실제로 나와 일을 같이하게 될 생물학자들과 같이 이야기를 한게 끝이었다. 이 회사에서 인상적이었던건 2가지. 현재 있는 건물이 작은 바이오텍들이 모여 있는 인큐베이터인데, 내가 좋아하는 탄산수를 비롯해서 다양한 차도 공짜로 마실 수 있고 심지어 스낵도 공짜로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큰 회사에도 이런건 없는데… 인터뷰한 회사의 CEO도 여기 렌트비를 비싸게 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건 적극적으로 이용해야한다고 이것저것 먹으라고 막 권해줬다. 또 인상적이었던 점은 작은 회사라 그런지 한 오피스 공간에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데, 마치 도서관처럼 길다란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거기에 칸막이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앉아 있었다. 앉는 공간이 좁아서 그런지 CEO도 주로 로비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들어가게 되면 난 그냥 랩에서 생활해야겠다.

어쨌든 평범한 인터뷰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뜬근없이 2차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지금 있는 큰 회사에서도 인터뷰 한번하고 끝났는데, 여긴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하면서 투덜대고 있는데, 더 가관이었던건 2차 인터뷰는 같이 앞으로 할 프로젝트에 대해서 brain storming을 하자는거였다. 뭐? 그건 뽑아놓고 해야하는거 아냐? 아이디어만 빼 먹고 안 뽑으려고? 어쨌든 난 직업을 구해야하는 을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인터뷰를 하러 갔다. 그런데 말이 brain storming이지, 사실은 대본 없는 압박 면접이었다. 상호간에 토론을 하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져놓고 나 혼자 brain storming을 해야하는거였다. 뭘 질문할지를 모르니 준비도 거의 못해갔고 이건 박사 디펜스보다 힘들었다. 게다가 MIT대학원생 위주로 구성된 회사라서 그런지 일반적인 생물학 전공자들과는 질문내용이 많이 달랐다. 일반적인 생물학 세미나에서의 질문을 지식에 대한 것을 물어보거나 자기가 궁금한 실험을 해봤는지를 많이 물어보는 반면, 이번 2차 면접은 방법에 대한 질문 위주였다. 그들의 접근 방식은 현재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으면 기존의 방법을 어떻게 바꿔서 그 문제를 해결할지에 대해서 주로 고민을 하고 나에게도 그런 질문들을 던져줬다. 이런식으로는 사고를 해본적이 없어서 답을 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그들도 대부분의 경우 정답을 모르는 상태로 질문을 하는거라 내가 뭐라고 말하던 반응이 별로 없었다. 최소한 내가 그들의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건 확실했다. 어쟀든 쭉 생물학계에 몸을 담았다가 공학적인 방법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신선하기도 했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나도 공학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던지라 이 회사에서 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는 순차적으로 레퍼런스를 요구해서 교수님과 현재 매니저의 연락처를 알려줬는데, 역시나 나에게는 과분하게도 두 분 모두 나에 대해서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인터뷰한 회사의 CEO가 좋은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고 감탄했다는 연락이 왔고, 오늘 전화를 통해서 오퍼를 받았다.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연봉협상을 해야했는데, 현재 회사에서 받은 오퍼가 어느 정도고 이것보다는 많이 받고 싶다니까 거기서 $1,000을 올려줬다(…) 얼마전에 우리 회사에 있는분으로부터 연봉 협상은 먼저 가격을 부른 사람이 패자라고 했는데 딱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뭐 사실 연봉은 협상하기 힘들거라고 알고 있어서 그 외에 이사 비용이나 거기 이사할 때까지 통근 비용좀 달라고 했더니 자기들이 그런건 해본적이 없지만 그정도는 해 줄 수 있을거라고 했다. 역시 미국은 뭐든 일단 요구는 다 하고봐야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상당히 고생했던 첫번째 직장 구하기와 달리 첫번째 정규직을 잡을 때는 고작 1군데 넣어서 오퍼를 받고 끝나버렸다.

진로 고민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여서 ‘과학자’라는 매우 불분명한 직업을 갖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과학 공부가 딱히 좋았던건 아니다. 시험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할 때 스트레스 받지 않고 나름 즐기면서 공부를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무언가가 더 알고 싶어서 책을 미리 펼쳐 본다던가 그 흔한 과학잡지도 열심히 읽지 않았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 자연대에 들어갔는데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어렴풋한 마음가짐은 있었지만 여전히 별로 열정적이지 않아서 학교 연구실에 인턴으로 들어갈 생각도 안해보고 교과서만 대충 배우다가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대학교 와서도 생물학은 여전히 암기과목이라서 공부가 그닥 즐겁지도 않았다.

웃긴건 그런데도 석사에 진학했다. 여전히 해보지 못한 연구라는걸 한 번 해보기 위해서. 처음으로 제대로 해 본 연구는 재밌었다. 교수님이 던져 준 주제는 재미 없었지만 그 외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예를 들어 실험실 선배가 낸 결과에 이상한 점을 파고 들어서 그게 왜 잘못됐는지를 밝힌다던가, 세포에 유전자를 발현시키는데 왜 특정한 유전자는 Lipofectamine을 써야 잘되고 PEI를 쓰면 전혀 발현을 하지 않는가(발현만 잘되면 됐지, 어떤걸 썼을 때 발현이 안됐다는건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등등 교수님이 생각하기에는 하등 쓸모 없는 실험만 재밌었다. 연구 주제는 재미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고민없이 유학을 나가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때도 석사때의 전철을 밟아서 내가 낸 논문은 남의 실험이 틀렸다고 반박하는 논문이었고, 서로 다른 PCR 기계가 다른 효율을 보이는걸 밝힌다던가 (보통은 다 비슷할거라고 믿고 쓴다), 교수님이 dNTP의 양이 많으면 PCR이 잘 안된다는걸 알려주셔서 실제로 그런지 gradient로 양을 늘려가면서 실험을 해본다던가(보통은 그냥 프로토콜에서 넣으라는대로 넣으면 된다). 그러고보니 아내한테도 종종 받는 지적인데 남들이 무슨 말을 하면 믿는게 아니라 직접 내 눈으로 꼭 확인을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여러가지 이유로 학계에는 더 이상 남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산업계로 들어가기로 했을 때 나의 유일한 목표는 아무거나 상관 없으니 그냥 돈 주면서 재밌어 보이는 연구를 시켜주는 곳이면 다 된다는 것이었다(너무 목표가 큰가?) 남들은 (내가 보기에는 매우 신기하게도) 연구하고 싶은 뚜렷한 주제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근데 난 사실 딱히 연구하고 싶은 주제라는게 없다. 그냥 뭔가 신기한게 있으면 실험을 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어디든 상관 없어! 라고 생각하고 닥치는대로 resume를 뿌렸더니 지금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기존에 하던 연구랑 전혀 상관 없는 곳인지라 대체 내가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파고들만한 연구 거리는 몇 가지가 있어서 덥썩 물었다.

그래서 하얀 가운을 입고 밤새 실험하는걸 로망으로 알던 고등학생은 별다른 고민이나 방황도 없이 박사 후 과정까지 죽 한 길로 달렸다. 지금까지는 합격만 시켜주면 감사합니다하고 대학, 석사, 박사, 포닥까지 밟았는데, 포닥을 하는 현재 랩에서 1년 반 가까이 지내면서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흔히 R&D 즉 Research & Development라는 말을 쓸 때 난 Research는 알고 있었지만 Development가 뭔지는 전혀 몰랐는데 지금 있는 랩이 Development를 하는 랩이었다. 실제 약을 발견 위한 연구는 전혀 하지 않고, 다른 그룹이 약을 디자인 해 오면 그걸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제로 생산하는 일을 하는 곳이 Development이다. 약을 직접 연구하진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실패에 대한 부담감도 없으며 랩에 있는 대부분의 인원은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생산만 잘 하면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거의 받지 않고 초과근무도 거의 하지 않는다. Development 팀이 없으면 약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회사가 없어지기 전에는 팀이 없어질 걱정도 안해도 되서 그런지 대부분 10년 이상 이 팀에서 근무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어쨌든 대학원에 비해서 근무시간도 확 줄어들고 연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성과를 꼭 내야한다는 압박이 없다보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더 빨리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정해진 스케쥴에 맞춰서 일을 한다. 어쨌든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생활을 하다보니 저녁 먹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고, 지금 당장은 운동도하고 아내랑 보드게임도 하고 주말에도 꼬박꼬박 보드게임 모임을 열면서 실컷 놀고 있다.

현재 직장에서의 계약이 올해 말로 만료가 되기 때문에 이제 새 직장을 알아봐야하는데, 뜬금없는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면서 인생을 살 것인가?’ 이전까지는 연구만 재밌게 하면서 살 수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돈도 적당히 벌면서 시간도 많아서 실컷 놀다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전제는 나에게 과연 선택권이 있느냐는 것인데 여러군데 오퍼를 받아서 골라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그냥 날 받아주는 곳으로 거기에 맞춰서 살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은 큰 회사로 가서 적당히 연구하면서 편안하게 사느냐 아니면 작은 회사에 들어가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해보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아내가 들려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I put all my genius into my life; I put only my talent into my works.’ 나에게 genius는 커녕 talent가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이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나에게 밥 벌어먹고 살 정도의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그건 일에 쓰고, 나머지는 (뭐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을 위해서 쓰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 같다.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면서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난 지금까지는 ‘연구를 하면서 산다’는 것 외에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일을 해보니 다른 선택지도 존재할 수 있다는걸 알았고,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잘 맞는 회사에 들어간다면 (아마 큰 기업에 들어가면 가능하리라 믿으며) 퇴근 후 그리고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게 된다. 당장 떠오르는건 보드게임, 운동 (골프, 근력 운동, 나중에는 다시 수영도 하고 싶다), 컴퓨터 공부, 빵굽기 정도? 사실 퇴근 후에 이걸 다 하기도 힘든 것 같긴하다.

반면에 작은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는 것도 재미는 있을 것 같다. 내가 대가 랩 규모의 큰 실험실 경험은 없지만 석사와 박사 랩을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인원이 많고 다양한 일을 하는 석사 때는 랩미팅 시간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 남들이 하는 연구를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해서 맨날 졸기만 한 반면에 박사 때는 이제 막 시작한 실험실이라 우리 랩의 다른 사람들 연구도 이해하기 쉽고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면서 참여를 했었다. 평생 사장 밖에 해본적이 없는 아버지도 종종 자기 소유의 회사면 120%의 역량을 발휘하지만 직원이라면 자기 능력의 50%밖에 쓰지 못한다면서 50%의 역량 밖에 안 쓰고 사는건 낭비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자기를 모두 쏟을 수 있는 경영에 취해서 이제 돈 안 벌고 편하게 사셔도 되는데 굳이 베트남까지 가셔서 또 혼자 고생을 하고 계시지만 아버지 나이에 그렇게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건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작은 회사에서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일을 하거나 창업을 하는 것도 재밌어 보인다. 다만 창업을 생각하면 연구 외에 경영도 내 적성에 맞을지는 좀 고민을 해봐야하는 문제다.

‘연구만 할 것인가, 놀기도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수동 자동차 운전기

여행 계획을 짜면서 3일 정도는 차로 움직이기로 했는데, 유럽에서는 스틱이 많고, 자동보다 더 싸다고 해서 스틱을 빌려서 운전해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1종 보통 면허 딸 때만 트럭으로 스틱을 몰아보고 그 다음에는 전혀 몰아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운전경력은 꽤 됐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대책없이 수동차를 빌리기로 했다.
그래도 어떻게 모는지는 한 번 봐야겠기에 유튜브에 15분짜리 동영상을 틀어놓고 발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수동차 모는법을 영상으로 배워봤다. 차를 출발할 때 키 포인트는 기어를 1단에 놓고 가속 페달을 밟아서 1500RPM으로 맞춰놓고 클러치를 약 7초 정도의 간격으로 천천히 떼는 것이었다. 일단 이것부터가 쉬워보이진 않았지만, 이것만 알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차를 빌리러 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나오는데, 일단 1500RPM이라는걸 유지하기가 엄청 힘들었다. 넓은 평지가 아니라 좁은 주차장이라서 천천히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차가 출발했다는 느낌이 들면 페달에서 발을 땠는데 RPM이 내려가면서 시동이 꺼져버렸다. 게다가 간신히 차가 출발을 해도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시동이 꺼지는 거였다!!! 가뜩이나 좁은 주차장을 천천히 이동해야 하는데 브레이크도 못 밟으면 대체 어떻게 움직이라는거야! 그래서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시동을 다시 켜고(다시 켜는 것도 수차례 반복해야 한번 켜졌다), 빌빌빌 기어가면서 주차장을 내려왔는데, 이제부터 시작되는 난관. 제대로 차를 몰지 못해서 주차장 티켓을 뽑기 위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티켓을 뽑는건 둘째치고, 차단기가 내려가기 전에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것도 크나큰 난관이었다.
가장 두려운건 신호등!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 기어 넣은체로 정지했다가 시동 꺼 먹은 것도 수십번이고, 게다가 다시 파란 불이 들어왔을 때 시동을 못 걸어서 몇번 버벅대다가는 다시 빨간불이 되어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당연하게도 빵빵 거리는 차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얌전하게 기다리는 차들도 꽤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 다음 문제는 우회전으로 도로 진입. 차가 없을 때 빠른 속도로 진입해야하는데, 1단으로 시동 넣기도 힘든데 대체 어떻게 속도를 내서 우회전을 하지? 그러다 긴장해서 1단으로 출발도 제대로 못해서 시동도 여러번 꺼먹었다.
여차저차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고속도로에 올라탔는데, 내릴 때가 되니까 또 문제였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또 시동이 꺼질 것 같고, 대체 저 커브를 어떻게 도는거지? 그래서 동승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브레이크는 안 밟고 가속 페달에서 발만 때면서 무식하게 커브를 돌아서 빠져 나갔다. 내가 원래 이렇게 무식하게 운전은 안하는데 재방아 미안해 ㅠ.ㅠ
여러 고생을 해서 이제 상단 기어로 올리는건 좀 익숙해졌는데 – 처음에는 1단 기어 넣듯이 2, 3단 이상으로 올라갈 때도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클러치를 때야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까 클러치를 다 떼고 가속 페달을 밟아야하는거였다 – 문제는 기어를 내리는거였다. 가속을 하다가 멈추는건 오히려 쉬웠다. 기어를 중립에 넣고 그냥 브레이크를 밟으면 됐다. 그런데 기어를 중립에 넣고 감속을 하다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가야하면 대체 무슨 기어를 넣어야 계속 움직이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행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우리 숙소가 산 속에 있어서 하루는 산을 타고 올라가야했다. 대체 산으로 올라갈 때는 무슨 기어를 넣고 가야하는거지? 당연하지만 올라가는 중간에 시동이 꺼졌고, 산 중턱에 브레이크 밟고 멈춰 있는데 대체 무슨 기어로 어떻게 시동을 걸어야 하는지 몰라서 시동을 수회 꺼먹고 빌빌 대면서 간신히 올라 갔다.
또 다른 난관. 주차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매표소 앞에서 차가 한대씩 앞으로 전진하고 서고를 반복하는데 심지어 그 매표소가 올라가는 길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까 나는 갈 때마다 출발을 못해서 앞 차가 저 멀찌감치 가고 나서야 간신히 시동을 걸어서 앞 차들을 따라 갔다. 심지어 내가 티켓을 끊으러 가는 차례에서도 시동이 몇 차례 꺼져서 매표소 직원분이 막 웃으셨다 ㅠ.ㅠ
스틱은 주차는 대체 어떻게 하는거지? 천천히 움직여서 차를 넣고, 앞뒤로 최소한 2,3번은 반복해줘야 하는데, 일단 천천히 뒤로 움직이는걸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엄청 고생했다 – 아직도 모른다. 게다가 후진하다가 다시 1단 기어로 바꿔서 앞으로 가다가도 시동은 수십번 꺼먹었다.
이제 차량을 반납해야하는 마지막날이 와서, 재방이는 호텔 앞에서 짐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하고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서 호텔로 올라가기로 했다. 문제는 여태까지 재방이가 모든 길 안내를 다 해서, 나는 이 동네에 대해서 방향 감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재방이만 유심을 쓰고 있어서 나는 네비게이션도 없었다. 재방이 왈 ‘밖으로 빠져 나와서 유턴해서 좌회전 하면 바로 호텔 나올거야’. 마지막날이라서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알겠다고 하고서 의기양양하게 차를 가지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유턴을 할만큼 거리가 안 나오는 도로였던 것이다! 심지어 도심가라서 일방통행도 잔득 있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2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 가기 위해서 도심을 뱅글뱅글 돌다가 강도 한 번 건너고, 기어 잘못 넣어서 전진 대신 후진 하다가 뒷차랑 부딪칠뻔도 하고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간신히 어딘가에 주차를 해 놓고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공짜 와이파이를 찾아서 구글 네비로 길 안내를 설정하고는 거의 40-50분은 걸려서 호텔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차 반납하기 직전에 차를 트램 가는 레일 위로 몰아서 (트램에 가고 있었다면) 정면 충돌 할뻔한 위기 등등을 넘기고 죽지 않고 사고 안내고 무사히 차를 반납했다. 도전할 거리가 있으면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다이나믹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몇년 안되서 전기차도 많이 보급되고 무인운전도 활성화 될텐데, 스틱은 그냥 더 이상 안 타는 걸로 해야겠다.

짧은 인생을 돌아볼 기회

이 동네 약대에 다니는 한국 학생에게서 나보고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표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박사 과정 때야 랩미팅이나 학과 내에서 또는 가끔 학회에서 연구 주제에 대해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어서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게 크게 낯선 일은 아닌데, 뜬금 없이 약대생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좀 난감했다. 심지어 나를 섭외한 분도 나보고 아무 발표나하면 된단다. 나에게는 크게 2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박사 때 연구했던걸 발표하거나 현재 회사에서 하는 연구를 발표하면 되는거였다. 문제는 회사에서 하는 연구를 발표하려면 미리 여기저기 허락을 받아야 하는 귀찮은 과정이 동반되고, 박사 때 연구를 발표하자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이미 출판된 논문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구하는 박사과정생이 아닌 전문직 약대생들 앞에서 연구 이야기를 하는게 과연 청중들에게 재미가 있으며 의미가 있는 일인지도 의문이라서 연구 이야기는 안하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뜬금없이 정한 내용은 짧은 내 인생사(?)를 죽 훑어보기로 했다. 과연 이게 재미가 있을지 아니면 연구보다 더 지루할지는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지만, 내가 보통 1, 2명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가끔하는 생물학 또는 학계에 대한 내 생각, 나의 인생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 데이터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워포인트 자료는 따로 만들지 않았는데, 그러다보니 대체 이 발표가 몇분짜리가 될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대신 평상시에 해보지 않던 스크립트를 미리 써봤는데, 여전히 시간에 대한 감은 오질 않고, 대체 내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1시간도 채울 수가 없는건가하고 당황도 하면서 발표 준비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왜 생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학부 때 암기만 하면서 얼마나 지루했는지, 그래도 대학원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질병 연구는 왜 하기가 싫었는지,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한 나의 학계에 대한 의견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내 커리어를 죽 한번 훑었다. 사실 난 농담도 잘 못하기 때문에 과연 내 개인사가 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흥미가 있을지에 대해서 발표를 하는 와중에도 도저히 감이오질 않았는데, 그것과 별개로 나 혼자는 신이나서 마구 떠들었다.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두번째 파트로 내 삶의 목표, 연애/결혼관, 취미에 대한 이야기도 준비를 했는데, 의외로 첫번째 파트에서 시간이 꽤 많이 흘러서 두번째 파트는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나는 따로 삶의 목표가 없이 재밌는 연구 시켜주고 돈주면 뭐든 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남자들 연애할 때 여자 외모보다는 똑똑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 멍청한 여자 만나서 똑같은 자식 낳으면 대체 그건 누구 탓을 하려는거냐, 미국에서 일할 수 있으면 여가 시간이 꽤 있을 수 있으니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취미가 하나쯤 있으면 인생이 좀 풍요로워질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보드게임을 소개하고, 청중들을 데리고 보드게임을 응용한 단체게임을 하나 했다. 아내가 나보고 보스턴 레크레이션 강사 하냐고 했었는데 자비 들여서 상품까지 걸면서 게임하는걸 보면 레크레이션 강사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보통은 매우 진지하게 진행이 됐을 것 같은 세미나에서 새파랗게 어린애가 인생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게임을 하자고 하는 상황이 청중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고 앞으로도 어딘가 리더가 되더라도 연구 또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는 많겠지만 내 인생 이야기를 이 정도 인원 앞에서 할 일은 거의 없을테니 꽤 드문 기회를 잡았고,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모임 홍보도 해서 새로운 멤버도 추가로 영입했다! 이 세미나는 KSEA (Korean American Scientists and Engineers Association)에서 후원한다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를 KSEA에서 쫓아내는건 아니겠지…

골프 연습

그동안 거의 해보지 않은 효도라는걸 해보겠답시다고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만났을 때 같이 필드를 나갈 수도 있고, 연습하면서 자세 교정이나 원 포인트 레슨 등 아버지와 교감할 수 있는 분야가 늘어날 것 같다는 게 주 이유였다. 레슨은 한번도 안 받고 동영상이랑 책 조금 읽고서는 무작정 연습장으로 가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바스켓을 다 치는 동안 제대로 공이 뜬건 단 1개. 그러면서 제대로 안 맞아서 손가락 물집만 잡혔다. 우리동네 근처에 동아리 선배님이 계시는데, 우연히도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가지고 비슷하게 골프 레슨을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음에는 같이 연습장을 나가봤다. 난 아무것도 해본적이 없지만 선배는 그래도 레슨도 몇 번 받으시고 연습도 좀 해보셔서 조언을 좀 해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매트 위에 놓고 치지 말고 작은 티 위에 올려놓고 쳐보라는 것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티에 올려놓고 치니 공이 그래도 하늘로 솟기 시작했다! 만세! 그동안 공이 데굴데굴 바닥으로만 굴러가다가 하늘 위로도 솟으니 뭔가 치는 맛이 났다. 그래도 레슨은 받아야겠기에 회사 근처에 있는 연습장에서 강습하시는 분에게 예약을 하고 레슨을 받으러 갔다.

친절하게도 첫날은 무료로 봐주고 무료 강습이 마음에 들면 다음부터 자기한테 배우면 된단다. 그래서 강습을 시작했는데 이 백인 아저씨 시작할때부터 끝날때까지 시가를 계속 피워물고 있어서 담배냄새 때문에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게다가 잘 치는 표본으로 프로의 스윙 영상을 보여주는데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한 큐에 하는 망언을 쏟아내셨다. 하지만 난 행동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구시대적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아저씨구나…하고 생각만 했지, 이런 쓰레기한테는 못배워! 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진 않았다. 어쨌든 내 스윙폼을 영상으로 촬영해서보니 고정되어 있어야 할 몸의 가운데 축이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외에도 몇가지 더 언급은 하셨지만 그걸 다 기억할 수도 없거니와 난 멀티태스킹이 안되서 한 번에 여러개를 신경 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축 고정!’ 하나만 생각하기로 하고 첫 레슨을 마쳤다.

배운걸 몸에 익히기 위해서 며칠 후에 연습장을 찾았다. 레슨을 받을 때도 딱히 티 위에 올려놓고 하라는 이야기가 없어서 다시 티를 빼고 매트 위에 공을 놨더니 역시나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몸의 축을 고정 시키기 위해서 머리를 한 점에 집중시켰더니 경쾌하게 따악! 하고 맞으면서 공이 드디어 하늘로 날아갔다. 포인트는 머리를 한 점에 집중시키는거였다. 문제는 스윙을 하는 동안 한 순간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클럽이 허공을 가르거나 땅을 치기 일쑤였다. 스마트폰과 게임의 영향으로 내 집중력이 바닥을 찍고 있는지라 스윙을 하는 짧은 순간 집중을 하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한 곳에 집중을 하는데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다보니까 스윙은 몇 번 못하고 정신이 먼저 지쳐버렸다. 그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을 때는 공이 잘 맞아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고는 연습을 마쳤다.

요즘 내 화두 중에 하나가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것인데, 이런식으로 계속 한 곳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운동 연습을 하는 것도 의식적으로 사고를 하는게 아닐까하고 흥분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한테 연습한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단칼에 ‘그건 별로 머리 쓰는 것 같지 않은데?’라면서 퇴짜를 놨다. 별 관련이 없나보다 ㅠ.ㅠ

어쨌든 일단 골프를 시작은 했으니 어느정도 필드에 따라 나갈만큼은 연습을 해야할 것 같은데, 연습하러 갈 때마다 엉뚱한 곳을 쳐서 손가락, 팔, 팔꿈치, 허리 등등 안 아픈 곳이 없다. 골프가 몸에 좋은 운동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빨리 제대로 스윙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필드 나가기 전에 온 몸에 골병이 들게 생겼다.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시간

회사에서의 하루일과를 돌아보다 문득 든 생각인데,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를 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생물학과 사람들이 그렇듯이 대부분의 시간을 파이펫을 들고 실험하는데 보내는데 이 과정은 반복 작업이라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 외에는 딱히 의식적으로 사고할 일이 없다. 게다가 실험에 익숙해지면 그 정신집중마저 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종종 실수하기도 하고. 그리고 매우 적은 시간을 실험을 설계하는데 쓰는데 이것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전에 실험이 꽝 나면 그냥 조건을 다른걸로 바꿔서 다시 해 보는 것이다. 내가 그 영역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런걸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에 생물학은 더 깊게 사고한다고 더 좋은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실험이 꽝 났을 때 왜 안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회사에서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를 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랩미팅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발표를 들을 때이다. 관심 있는 발표가 있으면 집중해서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질문도 많이하는 편인데 그 때 그나마 내가 사고를 하고 있구나라고 느낀다. 논문을 읽을 때도 이해를 하려면 의식적으로 사고를 해야하는데,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분야의 논문들이 매우 저차원의 논문들이라 사고하기 보다는 어이없는 논리에 분노만 늘어간다.

그래서 내가 너무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생겨서 실험을 할 때 계산기 사용을 줄이고 3자리 곱하기 2자리 정도의 계산을 암산으로 해보기 시작했다. 동아리 선배님들은 아직까지 수능 문제나 더 고차원적인 수학을 취미로 풀고 계시던데 난 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 수준이 거기까지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그런데 사실 요즘 내 일상에서 제일 머리를 많이 쓰는 분야가 따로 있긴하다. 바로 보드게임 룰북 읽을 때다. 정확하게 이해해야하고, 남들에게 설명까지 해주려면 머릿속으로 어떻게 설명을 하는게 좋을 것인가 시뮬레이션도 돌려보면서 온 정신을 집중해서 룰북을 읽는다. 사실 보드게임을 플레이 할 때보다 룰북을 읽을 때 훨씬 머리를 많이 쓰는 것 같다. 다른 사람 상황도 살피고, 다음 수도 계산하려면 치열하게 머리를 써야할 것 같은데 사실 내가 남들 견제하는데 별 관심도 없거니와 보드게임을 하면서 다음 수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체스나 바둑과는 달리 모든 정보가 처음부터 공개되어 있지 않아서 다음 수를 미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새로 나타나는 이벤트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최적의 수가 변하기 때문에 미리 열심히 생각하는게 큰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요즘 일할 때는 거의 머리를 안 쓰고 노는 준비를 하는데만 의식적으로 사고를 하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아내가 들려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에 따르면 ‘I put all my genius into my life; i put only my talent into my works’ 라고 하는데 내가 천재성은 없으니 그걸 내 삶에 넣을 수는 없고, 내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쥐꼬리만한 지적능력을 내가 노는데 쓰고, 회사에서 일은 그냥저냥 적당히 처리만 하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아, 그렇다고 회사 일이 재미 없다는건 아니다. 난 이걸 내가 똑똑하지 않다는 증거로 생각하는데, 난 파이펫 잡고 맨날 반복작업하는걸 꽤나 좋아한다.

메사츄세츠 면허 취득기

  1. 작년 9월 중순, 메사츄세츠로 가는 비행기를 아침비행기로 잡았다. 미리 인터넷으로 확인을 해봤는데 여기는 AAA(보험회사)에서도 면허 업무를 대행한다고 RMV(면허 발급해주는 곳)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 있어서 내가 임시로 살 곳과 가장 가까운 AAA로 향했다. 정작 가보니 renewal은 해줄 수 있는데 타주 면허는 안 바꿔준단다. 패닉에 빠져서 가장 가까운 RMV 주소를 구글맵에 찍고 그곳으로 향했다. 구글맵에서 찍을 때 고속도로 한복판이 찍혀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실제로 그 주소로 향하니 그냥 고속도로 한복판이었다. 응? 여기 무슨 RMV가 있다는거야? 반대 방향에 있나 싶어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 짧은 거리 왔다갔다하는데 톨이 하나 있어서 애꿎은 톨비만 내고 아무런 소득이 없이 미리 구한 룸메이트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한테 하소연을 했더니 “네가 면허 바꾸고 집으로 온다길래, 왠지 그런 문제가 생길 것 같았어. 면허 바꾸는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하지만 할머니도 내 면허 취득기를 들으시면 면허 바꾸는게 이렇게 힘들지는 모르셨을거다.
  2. 처음 이동네로 와서는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가 퍼뜩 텍사스에서 가지고 온 면허가 만료된다는걸 깨닫고는 부랴부랴 다시 RMV를 찾았다. 가장 가까운 RMV는 존재를 알 수가 없으니 그 다음으로 가까운 RMV를 찾아갔는데, 내 면허를 보자마자 ‘임시 면허는 못 바꿔줘’ 이러면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임시면허라 함은 텍사스에서 면허증을 발급해줄 때 영주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급해주는 면허증을 말한다. 이건 못 바꿔주니 새로 따라고 한다.
  3. 내가 있는 동네가 시골이라서 RMV에 외국인이 많이 없어서 규정을 잘 모르나보다하고, 다음에는 한국 영사관이 있는 watertown에 있는 RMV로 가봤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watertown으로 가는 길은 길이 꽤 막혀서 미리 꽤 일찍 집을 나서서 오전 8시에 도착했다. 9시까지 하염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니 RMV의 문이 열리고 한명씩 입장을 하는데, 여기서도 내 임시면허증을 보더니 입구에서 바로 쫓아냈다.
  4. 결국 면허증은 못 바꾸는거고 새로 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외국인이 가장 많을듯한 보스턴의 RMV로 가면 뭔가 다를 것 같아서 회사에 반차를 내고 기차를 타고 보스턴의 RMV로 향했다. 여기서도 문전 박대를 당하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줬다. 2017년 8월부터 규정이 바뀌어서 임시 면허는 못 바꿔주는거란다. 그래도 내 텍사스 면허가 곧 만료가 되니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면허를 얻어야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필기 시험을 신청하고 패스를 해서 learner’s permit을 받았다. 사실 learner’s permit은 동승자가 있어야 운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거 얻었다고 혼자 운전하면 불법이지만 그래도 만료된 텍사스 면허 들고 운전하는 것 보다야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기대감을 가지고 무턱대고 운전을 했다.
  5. 필기를 땄으니 이제 실기를 따야하는데, 여긴 실기 규정이 까다로워서 면허 가진 ‘어른’을 한명 데리고 오지 않으면 실기를 칠 수 없다고 한다. 그럼 아는 ‘어른’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어떻게 보라고??? 어쨌든 나는 이 동네에 아는 어른이 없으니 아내가 오는 12월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이 규정은 말이 되는게, learner’s permit은 동승자가 없으면 운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실기장까지 누군가와 함께 와야한다. 그러니 면허를 가진 어른을 실기시험에 동승시킬 수 밖에 없다.
  6. 그래도 learner’s permit을 가지고 운전을 하는건 뭔가 불안해서 이사를 하러 텍사스에 가면서 텍사스 면허를 새로 갱신했다. 문제는 이사를 해야해서 실제 면허가 우리집으로 오면 내가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허 갱신하면서 혹시 이거 메사츄세츠로 보내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택도 없단다. 할 수 없이 우편물 redict service를 신청해서 텍사스 옛 집으로 온 우편물을 메사츄세츠로 오게 해 놓은 다음 면허가 메사츄세츠로 날라오길 기다렸다.
  7. 다행히 텍사스 면허는 메사츄세츠로 날라와서 일단 완전 무면허 운전자는 아닌 상태로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8. 귀찮아서 면허 취득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동네에 같이 온 선배한테서 면허를 바꿨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규정이 올해 3월에 바뀌어서 임시 면허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선배도 임시 면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사히 바꿨다고 한다. 좋았어! 소식을 듣자마자 쏜살같이 다시 RMV로 달려갔으니 또 문전박대를 당했다. 임시면허를 바꿔줄 수는 있는데, 유효기간이 1년 이상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 그 당시에 유효기간이 한 8개월 밖에 안 남아 있었는데, 선배한테는 유효기간이 만료가 된 면허도 바꿀 수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항의를 했다. 항의가 먹혔는지 어딘가로 전화를 해봤는데 여전히 안 된단다. 또다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와서 찾아봤는데, 면허가 만료되면 못 바꿔준다는 규정은 없었다. 유효기간이 1년 이상 남아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있는데, 그건 면허 유효기간이 아니라 비자 유효기간이었다. 이 동네에 1년 이상 체류할 예정인 사람만 면허를 바꿔준다는건데, 멍청한 RMV 직원들이 그걸 면허 유효기간으로 생각한 것 같다.
  9. RMV가 제대로 몰랐건 어쨌건간에 안 바꿔준다는데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원래 계획대로 실기시험을 치기로 했다. 그래서 실기준비물을 알아봤더니 운전면허를 가진 ‘어른’ 외에도 준비할게 더 있었다. 일단 차에 사이드 브레이크가 없으면 시험을 칠 수 없다는 거였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실기시험을 치는 차처럼 동승자석에 브레이크가 없으니 실기시험자가 운전을 엉망으로 했을 때 제지할 수단이 필요해서 그런 것 같았다. 문제는 내 차는 엔진 브레이크가 사이드가 아닌 운전자 석에 있었다. 대체 그럼 요즘 차 산 사람은 시험을 어떻게 치라는거야!!! 친절하게 안내문으로 렌트카도 가능하다고 해서 사방의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봤는데 실기시험 치는 용도로는 차를 빌려줄 수 없단다. 그럼 나보고 시험을 어떻게 치라고!!!!! 할 수 없이 이 동네의 엿가락 규정을 믿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냥 내 차를 끌고 가봤으나 역시나 문전박대. 솔직히 말하자면 차도 문제였지만, 평가하는 사람이 차에 타기 전에 나보고 수기를 해보라고 했었는데 난 수기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거기서 일단 바로 탈락이었다. 텍사스에서는 실기 칠 때 그런거 없었는데 ㅠ.ㅠ
  10. 텍사스 면허를 바꿀 수도 없고, 실기도 못 치고.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은 한국 면허를 바꾸는 거였다. 그래서 한국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가서 잽싸게 한국 면허를 다시 발급받은 다음에 미국에 돌아와서 한국 영사관에 가서 번역 공증을 받았다.
  11. 자 이제 모든 서류가 준비됐어! 아내와 함께 다시 한번 RMV를 찾았다. 여전히 멍청한 직원들은 ‘우리 외국 면허도 바꿔줘?’ 하면서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고 다행히 규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입구는 통과했다. 그래서 줄을 서서 내 차례가 되어 관련된 서류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직원이 서류를 유심히 보더니, “텍사스 면허도 있어? 근데 왜 한국 면허를 바꿔?” 라면서 내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너네가 예전에 입구에서 통과 안 시켜줘서 못 바꿨단 말이다!!! 여전히 태연한 직원은 “그래? 3월에 규정이 바뀌었는데 그 전에 온거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말고” 이러면서 그냥 텍사스 면허를 바꿔주겠단다. 그럼 난 대체 영사관에 왜 갔다 온거지 ㅠ.ㅠ
  12.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줄 알았는데, 직원이 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응? 넌 왜 시력 검사하라는게 안 뜨지? 안경 쓰면 시력 검사 하라고 해야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다가 퍼뜩 필기시험을 칠 때 시력 검사를 했던게 생각이 나서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넌 한국 면허도 있고, 텍사스 면허도 있고, learner’s permit도 있다고? 그럼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이건 내 능력 범위 밖이야. 메니저를 만나봐” 라면서 나를 다른 창구로 안내했다. 설마… 또 안되는거야?
  13. 역시나 메니저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내 상황을 금방 이해하더니 “오늘은 안돼. 내일 다시 와. learner’s permit을 취소해야하는데 5시가 지나서 담당자가 퇴근했어” 라면서 또다시 나를 내 쫓았다. 옆에서 같이 신청을 하던 아내는 learner’s permit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에 텍사스 면허를 바꾸고 면허증을 내 눈앞에서 펄럭거렸다.
  14. 다음날 다시 RMV에 가서 “메니저 보러 왔는데요” 라고 말하니까 입구에서 “5번 창구로 가세요” 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5번 창구를 바라보니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입구 직원에게 물어보니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나올거야.”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해줘서 5번 창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5시가 지나면 그 직원 또 퇴근할텐데… 불안불안해하면서 한 1시간쯤 기다리니까 메니저가 나오긴 나왔는데 어찌나 바쁘던지 오피스를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그나마 나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한게 다행이랄까. 그러더니 갑자기 어디다 전화를 걸더니 그 전화기를 부하직원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넘기고는 나한테 말을 걸었다. “네 케이스가 복잡해서 여기다가 전화를 해서 해결해야하는데, 한 시간 째 대기 중이야. 내가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이 사람한테 부탁했으니까 이거 전화통화만 되면 바로 해결해줄게” 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15. 문제는 1시간이 넘게 기다렸다던 전화는 내가 목격한 이후로 1시간을 더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받지 않는 것 같았고, 그 사이 5시가 넘어버렸다. 내일 또 와야하나? 하고 좌절하고 있었는데 그 메니저가 나를 부르더니 9번 창구로 가면 해결해 줄거야 라면서 그쪽을 안내를 했다. 응? 아까 그 사람은 아직도 그냥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데? 뭐가 어떻게 된거지? 그리고 이미 5시는 넘었잖아? 어쨌든 가라고 해서 가서 대충 상황 설명을 해줬더니 그 사람이 여유 있는 목소리로 “내가 해결해줄게” 하더니 바로 메사츄세츠 면허를 발급해줬다!!!!!!!!! 만세!!!!!!!!!
  16. 주토피아에서 느림보가 왜 나오는지는 텍사스 시절부터 겪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실체는 사실 여기 있었다. 면허증 발급 받는게 영주권 따는 것보다 오래 걸릴 줄이야.

삽질의 즐거움

요즘 회사에서 간단한 실험이 안되서 한 달 넘게 진도를 못 나가고 있다. 실험 난이도는 중학생들이 실습할 때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다. 혹시 무슨 실험인지 궁금한 전공자를 위해 첨언 하자면, plasmid를 template으로 PCR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파이펫만 쥐어주면 누구나 성공해야하는 실험을 한 달이 넘도록 못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뛰어야 정상인데, 웃기게도 사실 난 지금 이 상황을 꽤 즐기고 있다. 과학을 하면 대부분은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것을 즐기는데, 난 그것보다는 당연히 된다고 (또는 안다고) 여겨지는 것에 의문점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 박사학위 논문도 결국은 남들이 했던 실험이 재현이 안된다는게 주요 논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태클 거는 일인거다.

어쨌든 당연히 되야하는 실험이 안되면 왜 안되는지 그 원인을 밝혀야 하는데, 우리랩은 그런 일을 하는 랩도 아니거니와 어떻게 밝힐 수 있을지에 대해서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원인을 밝히는데는 일찌감치 관심을 끄고 실험을 성공시키는데만 집중을 하고 있다. 물론 원인을 알면 성공시키기 더 쉬울 수도 있지만 몰라도 이것저것 시도는 해볼 수 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탐험이 아니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어떻게든 거기 도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계속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될듯말듯 실험결과가 나를 애태우지만, 실패할 때마다 두고보라고 씩씩거리면서 계속 시도를 해보고 있다. 한국가기 전에는 더 이상 새로 해볼만한 조건이 생각나질 않아서 잠시 멈췄었는데, 한국 가면서 머리를 잠시 비우고 나니 해볼만한 다른 조건들이 떠올라서 계속 시도 중이다. 다행히 디렉터가 그것도 못하고 있냐고 욕하고 나를 쫓아내진 않고 이것저것 해볼만한 조건들을 알려줘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열심히 삽질 중인 것 같다. 그리고 현재 내가 계약직이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성과를 내야한다는 압박감이 덜한 것도 내가 이런 사소한데 마음껏 집착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다. 내 프로젝트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라서 부서의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맞춰볼 필요도 없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어쨌든 성공할 때까지 계속 삽질해 보는건 즐거운 일이다. 반면 그 실험의 성공 자체는 그닥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