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손 VS 똥손, 보드게임에서 확률 예측

요즘 판데믹 레거시를 하고 있는데 멤버 중에 한 명이 내가 플레이어덱을 섞으니까 에피데믹 카드가 너무 빨리 나온다면서 나보고 똥손이라고 내가 섞지 말라고 한다.  일부러 에피데믹을 아래 넣지 않는 한 사실 누가 섞던 언제 나올지는 예측할 수가 없는 문제인데 내가 섞지 말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농담으로 듣고 그러려니 했다.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감염덱에서 무슨 카드가 나올지 대충 확률을 계산해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에 맞춰서 액션을 수행하고 예측에 맞게 나와서 기뻐하는건 좋은데, 예상하지 못했던 혹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카드가 나와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위의 멤버는 종종 ‘거봐! 내가 그거 나올 것 같다고 했잖아!’ 라면서 팀을 향해 약간의 비난 아닌 비난을 한다. 일단 그 카드가 나올 것 같다고 말한적도 없거니와 설사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럼 그에 맞춰서 액션을 하도록 유도를 해야지 카드가 나온 다음에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판데믹에서 큐브가 3개씩 쌓인 도시가 여러 개 있다면 그 중에 어떤 도시를 먼저 구할 것인가는 outbreak이 터졌을 때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내 액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서 정하는 것이지, 어떤 감염 카드가 먼저 나올지를 예측해서 행동을 하는건 그냥 찍기 게임과 다를바가 없다. 마치 주사위를 던진 다음에 ‘거봐! 내가 4가 나올거라고 했잖아!’라고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게임을 하다보면 주사위를 잘 굴리거나 카드를 잘 뽑는 사람에게 금손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그 반대의 사람에게는 똥손이라면서 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이것도 말도 안되는데 누군가가 그런 별명을 붙여주고 나면 확증편향이 생겨서 그런쪽 이벤트만 더 눈에 들어오게 되서 생기는 일일뿐이다. 보드게임을 ‘많이’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운이 없는 날과 운이 좋은 날이 사실 비슷하게 있다. 거기서 더 웃긴건 ‘네가 금손이니까 이번에는 네가 굴려봐!’ 또는 ‘네가 카드 뒤집어 봐!’라고 하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이야기하기 민망하지만 모든 주사위는 독립적이라 전에 잘 굴린거랑 지금 잘 굴리는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카드는 누가 뒤집던간에 이미 정해져 있다. 물론 농담처럼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내가 농담을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져서인지 별로 재미도 없고 짜증만 났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꽤 많은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하면서 어떤 확률에 ‘희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카드가 나올 확률이 더 높다거나 특정한 주사위 눈금이 나올 확률이 높다면 그걸 계산해서 다음 전략을 생각해보는건 의미가 있는 일일것이다. 예를 들어 간츠 숀 클레버에서 파란색 보너스를 얻었을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나올 확률이 적은 2, 12 등의 숫자를 지우는건 의미 있는 전략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높은 숫자가 나오길 바라면서 마지막 주사위로 주황색을 남기는건 그냥 도박이지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확률을 계산해서 높은 확률이 나오는 쪽으로 선택을 하는건 의미가 있지만 주사위 눈금처럼 정확히 나올 확률이 같은 이벤트에서 어떤 특정한 값에 기대를 갖는건 그냥 의미없는 찍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드게임에서 찍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어떤 값에 기대를 걸고 주사위를 굴렸을 때 그 눈금이 나온다면 그냥 심드렁하게 굴린 사람보다는 훨씬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반면에 그 눈금이 안 나왔을 때는 더 실망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실망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서 자연스럽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고를 하게 됐다. 그래서 주사위를 굴릴 때도 그냥 무슨 눈금이 나와야 나한테 좋을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고 일단 굴린다. 생각해봤자 그 눈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다 최근에 카지노에 가서 기대가 주는 희열과 실망을 제대로 느껴봤다. 룰렛에서 칩을 걸고 나니까 저절로 몸이 일으켜지면서 룰렛의 공이 어디로 가는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게 됐던 것이다. 이래서 가장 재밌는 게임은 돈 걸고 하는 게임이라는 말이 나오는거구나.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홀짝을 맞추는건데도 한판 한 판의 감정 기복이 엄청나서 몇 판 하고 나서는 긴장해서 손이 차갑게 식고 몸이 떨렸다 (고작 15불짜리 배팅이었다). 그래도 보드게임에서도 이렇게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6만을 바라보면서 주사위를 굴려야 하는 이클립스나 황혼의 투쟁보다는 굴린 다음에 무얼 가져갈까 고민을 하게 되는 간츠 숀 클레버가 나에게는 훨씬 재밌었다. 요즘 보드게임의 트렌드도 주사위의 어떤 눈금만을 기대하게 만들기 보다는 미리 확률을 계산해서 선택을 하게 하거나 이미 주사위를 던진 다음에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줘서 나에게 훨씬 잘 맞는 것 같다.

룰을 익히는 방법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룰을 익히는 법이다. 룰북은 소설책이 아니다보니까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룰을 읽어나가야 한다. 다행히 난 룰북을 읽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룰 설명도 어느 정도 가다듬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룰 설명이 어느 정도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진행해보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 정도이다. 그런 일을 자주 겪다보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언어’라는 매우 복잡하고 예외로 범벅이 된 시스템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크게 무리없이 이해하고 사용하는데, 왜 고작 보드게임 룰 익히는걸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걸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룰 설명해야하는 사람이 아닌, 룰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 룰 익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설명을 충실하게 했다고 가정했을 때 듣는 사람이 룰을 이해 못했다면 1) 그 사람이 집중을 안했거나, 2) 한 번에 이해할만큼 룰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집중을 안/못 하는 것일까? 일단 게임을 별로 하기 싫은 사람은 그 게임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집중은 하고 싶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뇌가 이해하기를 포기하면 그때부터는 집중하기가 힘들다. 내 궁금증은 여기서 시작한다. 같은 설명을 듣고 왜 누구는 이해를 할 수 있고, 누구는 멍하니 있는것일까? 일단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건 배경지식의 차이였다. 보드게임을 많이 접해본 사람이라면 처음 듣는 룰이라도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게임의 룰과의 대조를 통해서 새로운 룰을 좀 더 쉽게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보드게임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종종 룰을 매우 빠르게 습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첫판부터 자신만의 전략을 짜고 심지어 경험자를 상대로 승리를 하기도 한다. 그냥 더 똑똑한 사람이 룰도 더 잘 이해하는건가? 그럴수도 있지만 혹시 사람마다 룰을 습득하는 방법이 다른건 아닐까? 라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아까의 비교로 돌아가서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모국어는 문제없이 배우고 구사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훨씬 간단한 보드게임 룰을 습득하는데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그 둘의 차이가 뭘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사람들은 언어를 ‘룰’로 습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들이 처음 모국어를 배울 때 주변에서 하는 말을 따라 배우지, 문법으로 배우지 않는것처럼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다보니 모임에서 룰설명을 할 때마다 종종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룰 설명이 끝나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물어보면, 하나도 이해 못한 표정으로 “한 번 해보면 알겠지” 하면서 얼른 게임을 시작하자고 재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게임에 들어가서는 아무 액션이나 해보고 ‘이거 되는거야?’라고 물어보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서 그 액션의 기능을 익힌다. 예를 들어 테라포밍 마스를 하면서 일단 돈을 내고 카드를 깔아 본 다음에 룰 마스터가 효과를 적용해주는걸 보면서 그 카드가 무슨 일을 하는건지 배운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언어를 배우듯이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면서 룰을 익혀나간다. 경험을 통해서(한 턴 또는 한 게임을 해보면서) 룰을 습득하는 방법을 편의상 귀납적 룰 습득방법이라고 칭하고, 게임을 해보기 전에 룰마스터가 해주는 설명을 듣고 룰을 익히는 방법을 연역적 룰 습득방법이라고 해보자.

연역적 룰 습득방법이 귀납적 룰 습득방법보다 우월한가? 라고 물어보면, 일단은 그런 것 같다. 귀납적으로 익히는 사람이 첫 게임에 좌충우돌하면서 룰을 습득하고 있는 와중에 연역적으로 룰을 익힌 사람은 첫 판부터 시스템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적인 움직임을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역적 사고방식이 보드게임의 만능은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바둑을 들 수 있다. 바둑 룰은 둬보지 않고도 익힐 수 있지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험을 통해서 최선의 수를 찾아야 한다. 심지어 컴퓨터마저도 연역적인 방법으로는 인간에게 바둑을 이길 수 없어서 경험을 통해서 답을 찾는 기계 학습으로 AI를 만들고 나서야 인간 고수를 이길 수 있었다. 사실 귀납적 사고가 훨씬 인간의 본래 사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좌충우돌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경험을 통해서 익히는 언어는 대부분 익힐 수 있지만, 규칙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적용해서 문제를 푸는 수학은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수학도 수 많은 연습문제를 반복적으로 풀면서 귀납적으로 배울 수도 있다. 이게 과연 진짜 수학을 잘하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룰 설명으로 돌아가서 내가 룰 설명을 들을 때, 대충 설명한 후에 ‘한 턴만 돌아보면 다 알 수 있어’라면서 일단 게임을 시작하는걸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룰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전략을 짜면서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 나는 뭔지도 모르면서 이것저것 해보느라 턴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게임 룰을 익힌 중반쯤에 가면 이미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늦었고, 즐거운 게임이 아니라 룰을 익히는 게임이 되어버려서 게임이 끝나고 나서 뭔가 찝찝했다. 심지어 요즘은 신작이 나오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져서 같은 게임을 여러 판 돌리지도 않으니, 룰을 처음부터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계속 룰 익히는 게임만 반복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난 “한 턴만 해보면 알아”류의 설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 그리고 사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귀납적으로 룰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더 이해하기 쉬운 방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모두가 잘 알아 듣는 최고의 룰 설명방법이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의 룰 설명러라면 룰을 듣는 사람의 성향까지도 파악해서 룰 설명 방법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하는건가보다.

 

짧은 인생을 돌아볼 기회

이 동네 약대에 다니는 한국 학생에게서 나보고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표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박사 과정 때야 랩미팅이나 학과 내에서 또는 가끔 학회에서 연구 주제에 대해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어서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게 크게 낯선 일은 아닌데, 뜬금 없이 약대생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좀 난감했다. 심지어 나를 섭외한 분도 나보고 아무 발표나하면 된단다. 나에게는 크게 2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박사 때 연구했던걸 발표하거나 현재 회사에서 하는 연구를 발표하면 되는거였다. 문제는 회사에서 하는 연구를 발표하려면 미리 여기저기 허락을 받아야 하는 귀찮은 과정이 동반되고, 박사 때 연구를 발표하자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이미 출판된 논문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구하는 박사과정생이 아닌 전문직 약대생들 앞에서 연구 이야기를 하는게 과연 청중들에게 재미가 있으며 의미가 있는 일인지도 의문이라서 연구 이야기는 안하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뜬금없이 정한 내용은 짧은 내 인생사(?)를 죽 훑어보기로 했다. 과연 이게 재미가 있을지 아니면 연구보다 더 지루할지는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지만, 내가 보통 1, 2명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가끔하는 생물학 또는 학계에 대한 내 생각, 나의 인생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 데이터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워포인트 자료는 따로 만들지 않았는데, 그러다보니 대체 이 발표가 몇분짜리가 될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대신 평상시에 해보지 않던 스크립트를 미리 써봤는데, 여전히 시간에 대한 감은 오질 않고, 대체 내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1시간도 채울 수가 없는건가하고 당황도 하면서 발표 준비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왜 생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학부 때 암기만 하면서 얼마나 지루했는지, 그래도 대학원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질병 연구는 왜 하기가 싫었는지,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한 나의 학계에 대한 의견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내 커리어를 죽 한번 훑었다. 사실 난 농담도 잘 못하기 때문에 과연 내 개인사가 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흥미가 있을지에 대해서 발표를 하는 와중에도 도저히 감이오질 않았는데, 그것과 별개로 나 혼자는 신이나서 마구 떠들었다.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두번째 파트로 내 삶의 목표, 연애/결혼관, 취미에 대한 이야기도 준비를 했는데, 의외로 첫번째 파트에서 시간이 꽤 많이 흘러서 두번째 파트는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나는 따로 삶의 목표가 없이 재밌는 연구 시켜주고 돈주면 뭐든 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남자들 연애할 때 여자 외모보다는 똑똑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 멍청한 여자 만나서 똑같은 자식 낳으면 대체 그건 누구 탓을 하려는거냐, 미국에서 일할 수 있으면 여가 시간이 꽤 있을 수 있으니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취미가 하나쯤 있으면 인생이 좀 풍요로워질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보드게임을 소개하고, 청중들을 데리고 보드게임을 응용한 단체게임을 하나 했다. 아내가 나보고 보스턴 레크레이션 강사 하냐고 했었는데 자비 들여서 상품까지 걸면서 게임하는걸 보면 레크레이션 강사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보통은 매우 진지하게 진행이 됐을 것 같은 세미나에서 새파랗게 어린애가 인생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게임을 하자고 하는 상황이 청중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고 앞으로도 어딘가 리더가 되더라도 연구 또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는 많겠지만 내 인생 이야기를 이 정도 인원 앞에서 할 일은 거의 없을테니 꽤 드문 기회를 잡았고,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모임 홍보도 해서 새로운 멤버도 추가로 영입했다! 이 세미나는 KSEA (Korean American Scientists and Engineers Association)에서 후원한다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를 KSEA에서 쫓아내는건 아니겠지…

협력이란 무엇일까?

보드게임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 두 명과 판데믹 본판을 해봤다. 한 분은 판데믹 이베리아를 해봤고, 나머지 한 분은 판데믹을 전혀 접해보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쉬운 메딕과 제너럴리스트를 드리고 나는 전체적인 판을 지휘하는 디스패쳐를 잡았다. 이베리아를 해보신 분은 워낙 게임을 익히는 속도가 빨라서 자기 케릭터를 능수능란하게 움직였지만 처음 해보신 분은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감을 잡지를 못하셨다. 뭔가 특수 능력이 있는 케릭터를 줘서 방향성이라도 줄걸 잘 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보드게임 덕후들이 협력 게임을 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 있다. 모든걸 진두지휘하는 알파게이머가 되지 말자.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알파 게이머의 아바타가 되어서 시키는대로 따라만 하다가 게임이 끝날뿐이다. 그래서 제너럴리스트를 잡으신 분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계셔도 목표만 알려드리고(‘우리의 목표는 질병의 확산을 막고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뒀다. 문제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계속 방황하고 있자 다른 한 분 ‘이렇게 움직여서 이 큐브를 없애면 될 것 같아요’ 라고 친절하게 조언을 해주면서 직접 말까지 옮겨주는 것이었다. 보드게임 많이 접해보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최대한 전문용어(…)의 사용을 자제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순간 당황해서 ‘그런걸 알파게이머라고 하는거에요. 협력 게임할 때는 최대한 다른 사람 훈수 두지 말고 각자 길을 찾아야지 아니면 그 사람은 내내 아바타 밖에 안되요’ 라고 주의를 주었더니 그 분이 ‘왜요? 협력 게임이잖아요. 이렇게 도와주는게 협력이죠.’ 라고 반박하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어? 생각해보니 무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협력은 맞네? 그래서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한 분은 다른 한 분의 아바타가 되서 거의 둘이서 게임을 끝냈다. 다행히 승리는 했는데 아바타를 하셨던 분에게 게임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재밌었단다. 사실 게임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소감을 물으면 다들 그냥 재밌었다고 대답하는걸 알고 있었기에(나 같은 덕후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거나, 심지어 별로 재미 없었다라고도 이야기 해주지만, 초보자들에게 그런걸 바라는건 무리다) 바보 같은 질문인건 알았지만 아바타 노릇 하느라고 힘들었을 것 같아서 한 번 물어봤다. 그리고 나서 이 게임에는 레거시 버전이 있는데 케릭터가 업그레이드 되고 미션 목표도 바뀌고 도시도 파괴되는 등 다양한 일이 벌어지는 게임인데 혹시 같이 해볼 생각 있냐고 물어봤더니 하고 싶단다. 아바타 하면서도 재밌었나?

그래서 전처럼 대체 왜 재밌었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같이 무언가를 해결해 나간다는 과정이 재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내 생각에는 아바타 노릇이었지만 그분 입장에서는 도움을 받으면서 같이 협력해 나간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협력 게임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됐다. 대체 협력게임에서는 무엇을 협력하는걸까? 협력은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말하는건데 나를 포함한 많은 보드게이머들은 협력게임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요청하는 초보자들을 알파게이머가 되지 않기 위해 매몰차게 내친다. 협력 게임에서 진정한 협력을 볼 수 있는건 게임 내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주는 경우인데 최근에 나온 정령섬 정도가 서로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치지 그 외의 대표적인 협력게임인 판데믹이나 로빈슨 크루소 등은 각자가 맡은 역할을 이용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할뿐 상호간에 도울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협력게임은 단지 공동의 목표가 있을뿐 실제로 협력을 하진 않고 심지어 보드게이머들은 알파게이머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이렇게 하는게 상대방이 더 즐겁게 게임을 즐기는 방법이라 믿으며 게임 외적인 도움조차 거절하면서 협력게임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협력게임’이라는 말보다 ‘공동의 목표가 있는 게임’이라고 하는게 이런 종류의 게임을 더 잘 묘사하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협력게임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토론이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그게 꼭 협력을 말하는건 아니다. 사실 토론하다보면 되려 싸우거나 화가나고 답답한 경우가 더 자주 있다(특히 본인이 게임에 익숙해서 더 좋은 길이 보일 경우). 결론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과 협력 게임을 할 때는 알파게이머를 의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주는게 모두가 즐겁게 게임을 할 수 있는 방향인 것 같다. 물론 잘 못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면 답답함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의 협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인지된 밸런스 vs 실제 밸런스

예전에 다이스타워에서 디자이너들이 밸런스를 잡으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몇 판 안해보고 밸런스가 엉망이라는 리뷰나 후기를 쓰고 있는데 이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케릭터가 다양할 경우 케릭터간 밸런스가 엉망이면 내 실력이 아닌 케릭터를 잘못받아서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나쁘고, 테크트리가 다양한데 한쪽의 테크트리가 좋으면 모두가 그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게임이 지루해 질 수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밸런스에 예민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전략 게임 한판 한판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디자이너가 밸런스를 잘못 잡아서 내 게임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그 시간이 무척이나 아까울 수도 있다. 소위말하는 밸런스가 엉망이라는 게임들에 대해서 디자이너가 항변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밸런스와 실제 게임의 밸런스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두 판 해보고 ‘에이, 이 케릭터(또는 테크트리) 왜 이렇게 센거야?’ 이런 밸런스 X망 게임 따위 안해’ 라고 그 게임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더 이상 게임을 하질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실은 게임을 여러번 해봐서 익숙해지면 꼭 그 케릭터가 더 강한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처음에 약하다고 생각했던 케릭터가 게임에 익숙해지면 더 강할 수도 있는데 잘못된 첫 인상 때문에 더 이상 플레이되질 않아서 게임이 사장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스플렌더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게임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게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확하게 계산을 하고 들어가면 3레벨 카드를 모으는게 귀족 타일을 모으는 것보다 효율이 좋다는걸 파악할 수 있지만, 대다수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을 처음 가르쳐주면 1레벨 카드부터 모아서 카드를 할인받고 귀족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초보들과 게임을 하면 일단 1레벨 카드가 다 없어진 다음부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는 반면에 게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보석만 모으면서 3레벨 카드를 가져가려고 한다. 이렇게 스플렌더는 초보들이 인지한 밸런스(귀족 테크)와 게임의 실제 밸런스(3레벨 카드 테크)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게임이다. 사실 이 게임처럼 게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이길 수 있도록 테크간의 밸런스가 안 맞는 게임도 드물고, 이게 디자이너가 의도했던 점이었을까도 궁금하긴 하지만 어쨌든 많은 게임들에는 익숙해져야만 더 강한 케릭터, 카드, 테크트리들이 존재하고 이런것들은 몇 판 안해 본 사람들에게는 밸런스가 무너진 게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모든 테크트리의 인지된 밸런스가 실제 밸런스와 같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게임을 만들게 되면 한눈에 인지된 내용이 게임의 전부라는 이야기가 되어서 ‘파고들 요소’가 없어서 게임이 금방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각 테크트리 간에 인지된 밸런스와 실제 밸런스 사이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해서 각 테크간에 밸런스가 너무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숙련자가 잡았을 때 좀 더 빛을 볼 수 있는 테크를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모든 밸런스 문제는 사실 게임의 재미로 다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테라 미스티카의 예처럼 종족간 밸런스가 무너졌어도 게임이 재밌으면 유저들이 알아서 경매등으로 밸런스를 맞추기도 하고, 인지된 밸런스가 엉망인것처럼 보이는 게임들도 게임이 재밌으면 다시 한 번 플레이를 해보면서 약해보이는 테크트리를 이용해보려는 유저들이 나타나고 그러다가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다. 아직까지 보드게임에서도 이런 예가 있는지 모르겠는데(그리고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장수하는 PC 게임에서는 메타라는 것도 존재해서 게임 자체는 그대로 있는데 그 당시에 유행하는 전략에 따라서 강했던 케릭터가 찬밥 취급을 받기도 하고 그 반대의 현상도 일어난다. 이 경우에는 밸런스 자체가 어떤 고정된 값이 아니라 유저들에 의해서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보드게임 몇 판 해보고 밸런스가 엉망이라고 치워버리지 말고 약해보이는 테크도 한 번 더 쳐다보면서 좀 더 연구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보드게임의 재미란 어디서 올까?

얼마전 모임에서 초보자분에게 욕심을 내서 테라포밍 마스를 가르쳐봤다. 아이콘만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초보자들도 따라올 수 있는 게임이라서 한 번 시도를 해봤는데 시작부터 쉽진 않았다. 처음에는 차근차근 가르쳐 준다고 비용을 지불하고 카드를 깔면 해당 카드의 이펙트를 하나씩 설명해주면서 해당하는 자원을 얻거나 마커를 옮기라고 가르쳐줬다. 한 2라운드쯤 하고 나서는 이제 대충 아이콘은 이해를 했겠지라고 생각해서 혼자하게 놔둬봤더니, 비용을 지불하고 카드를 깔고는 가만히 있길래 물어봤다. ‘이 카드 효과가 뭐에요?’ 그랬더니 뭔지 모르겠단다. 초보자에게 테라포밍 마스를 내민건 내 선택이기 때문에 ‘그럼 대체 왜 깔았어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테라포밍 점수며, 자원을 몇 개 얻어야 한다고 설명해줬다. 그래서 게임이 끝날때까지 그분이 카드를 플레이 할 때마다 마치 컴퓨터처럼 내가 효과처리를 다 해주면서 게임을 진행했다. 초보자용 세팅으로 진행해서 모두가 생산량이 1씩 있어서 게임이 금방 끝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고생을 좀 할뻔했다. 그래서 무리한 게임을 내민 내 자신을 자책하면서 그날 모임을 마쳤다. 집에 돌아가니 오늘 고생하신 초보분에게서 테라포밍 마스가 정말 재밌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응? 오늘 어려운 게임해서 고생한거 아니었나?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라고 해서 립 서비스를 해준건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 갔는데, 다음주에 모임을 나와보니 무려 그 게임을 직접 사 가지고 오셨다! 그동안 게임을 샀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없었는데, 왠지 그 분이 산 첫 게임이 테라포밍 마스인 것 같았다.

그분이 테라포밍 마스를 산걸 보고 나서는 머릿속에 혼란해졌다. ‘그날 게임이 진짜 재밌었단 말이야? 카드 효과를 하나도 이해 못하면서? 대체 어디서 재미를 느낀거지?’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게임까지 샀어요?’라고 묻는건 좀 무례한 것 같고,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왜 재밌었냐고 물어봤을 때 제대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마치 아내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아! 맛있다!’라고 좋아하니까 아내가 ‘뭐가 맛있는데?’ 라고 물어봤을 때 내가 할 말이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혼자 고민해봤다. 대체 그분은 어디서 테라포밍 마스의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일단 내가 전략게임에서 느끼는 재미는 점수를 많이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시켜보는데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남들을 견제하는데서 큰 재미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기는데서 재미를 느낀다. 그분은 테라포밍 마스를 하면서 여기 어딘가에 해당하는 재미를 느꼈을 것 같진 않다. 그래서 든 생각인데 (비록 자신이 낸 카드가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카드를 깔았을 때 자원도 받고 생산량도 올라가고 테라포밍 점수도 올라가는 등 무언가 효과가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 자체가 재밌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기들이 장난감의 버튼을 눌렀을 때 소리가 나면 계속 눌러보는 것이나 내가 자동차의 크루즈 모드로 처음 차를 몰거나 핸드폰으로 결제를 처음 해봤을 때 신기해 했던것처럼 말이다.

다른 이야기로, 모임에서 어떤분이 뱅을 예전에 재밌게 했었다면서 우리 모임에서도 하고 싶어하셨다. 그런데 난 뱅을 포함한 마피아 게임을 별로 안 좋아한다. 뱅의 경우 초반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에 한동안은 영문도 모른체 아무나 때려야하며,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밸런스가 엉망이되며, 먼저 죽었을 경우에는 게임이 끝날때까지 그냥 지켜만 봐야 한다. 웃긴건, 나도 한 10년전에는 친구들과 밤을 새면서 뱅을 한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재미 없었냐고 물어보면 사실 꽤 재밌게 놀았었다. 보드게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고 많은 리뷰들을 읽으면서 좀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드게임을 바라보게 되면서 예전에 재밌게 했던 게임들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재미도 같이 없어졌던 것이다. 카탄과 모노폴리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매일 친구집에 가서 하던 호텔왕 게임인데 지금 다시 모노폴리를 하자고 하면 두 시간 동안 어떻게 주사위만 굴리고 있냐면서 피해다닐 것이다. 그렇다고 카탄과 모노폴리가 어렸을 때만 재밌는 게임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것도 아니다.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게임들이고 다른 보드게임은 몰라도 카탄은 해봤고 좋아하는 성인들도 많이 있다.

마치 내가 보드게임 엘리트주의에 빠진 것 같다. 이렇게 재밌는 최신 보드게임들이 널렸는데 그까지 오래되고 주사위만 굴리는 운빨 게임이 뭐가 그리 재밌냐고 폄하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봤다. 카탄 이후로 더 이상 보드게임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보드게임을 하고 있을까? 지금 생각에는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그럼 지금 이후로 더 이상 보드게임이 나오지 않는다면 5년 후에도 계속 보드게임을 하고 있을까? 지금 생각으로는 ‘그렇다’ 이다. 아직 해보고 싶은 재밌는 게임들은 넘쳐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게임들도 리플레이성이 좋아서 맞는 상대만 있다면 언제든지 계속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5년 후에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구닥다리 테라포밍 마스, 아그리콜라 같은것만 평생 돌릴 생각을 했다니!!’ 라면서 어마어마하게 재밌는 게임들이 나온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과거의 나를 멍청하게 여길까? 아니면 여전히 그 게임들이 모던 클래식으로 사랑받고 있을까?

매년 천 개가 넘는 신작들이 쏟아져 나오고 긱순위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지구상 대부분의 소위 비보드게이머들은 카탄과 모노폴리를 재밌게 플레이하고 있다. 게임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는 것이 재미의 역치를 높여 버린걸까? 그럼 이 역치값의 한계는 어디일까?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시간

회사에서의 하루일과를 돌아보다 문득 든 생각인데,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를 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생물학과 사람들이 그렇듯이 대부분의 시간을 파이펫을 들고 실험하는데 보내는데 이 과정은 반복 작업이라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 외에는 딱히 의식적으로 사고할 일이 없다. 게다가 실험에 익숙해지면 그 정신집중마저 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종종 실수하기도 하고. 그리고 매우 적은 시간을 실험을 설계하는데 쓰는데 이것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전에 실험이 꽝 나면 그냥 조건을 다른걸로 바꿔서 다시 해 보는 것이다. 내가 그 영역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런걸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에 생물학은 더 깊게 사고한다고 더 좋은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실험이 꽝 났을 때 왜 안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회사에서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를 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랩미팅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발표를 들을 때이다. 관심 있는 발표가 있으면 집중해서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질문도 많이하는 편인데 그 때 그나마 내가 사고를 하고 있구나라고 느낀다. 논문을 읽을 때도 이해를 하려면 의식적으로 사고를 해야하는데,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분야의 논문들이 매우 저차원의 논문들이라 사고하기 보다는 어이없는 논리에 분노만 늘어간다.

그래서 내가 너무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생겨서 실험을 할 때 계산기 사용을 줄이고 3자리 곱하기 2자리 정도의 계산을 암산으로 해보기 시작했다. 동아리 선배님들은 아직까지 수능 문제나 더 고차원적인 수학을 취미로 풀고 계시던데 난 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 수준이 거기까지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그런데 사실 요즘 내 일상에서 제일 머리를 많이 쓰는 분야가 따로 있긴하다. 바로 보드게임 룰북 읽을 때다. 정확하게 이해해야하고, 남들에게 설명까지 해주려면 머릿속으로 어떻게 설명을 하는게 좋을 것인가 시뮬레이션도 돌려보면서 온 정신을 집중해서 룰북을 읽는다. 사실 보드게임을 플레이 할 때보다 룰북을 읽을 때 훨씬 머리를 많이 쓰는 것 같다. 다른 사람 상황도 살피고, 다음 수도 계산하려면 치열하게 머리를 써야할 것 같은데 사실 내가 남들 견제하는데 별 관심도 없거니와 보드게임을 하면서 다음 수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체스나 바둑과는 달리 모든 정보가 처음부터 공개되어 있지 않아서 다음 수를 미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새로 나타나는 이벤트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최적의 수가 변하기 때문에 미리 열심히 생각하는게 큰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요즘 일할 때는 거의 머리를 안 쓰고 노는 준비를 하는데만 의식적으로 사고를 하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아내가 들려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에 따르면 ‘I put all my genius into my life; i put only my talent into my works’ 라고 하는데 내가 천재성은 없으니 그걸 내 삶에 넣을 수는 없고, 내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쥐꼬리만한 지적능력을 내가 노는데 쓰고, 회사에서 일은 그냥저냥 적당히 처리만 하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아, 그렇다고 회사 일이 재미 없다는건 아니다. 난 이걸 내가 똑똑하지 않다는 증거로 생각하는데, 난 파이펫 잡고 맨날 반복작업하는걸 꽤나 좋아한다.

메이지 나이트 2인플 후기

메이지 나이트 확장은 한 3, 4년전에 샀지만 계속 룰북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해서 제대로 돌려보지 못하고 있다가 저번 주 주말에 작정하고 룰북을 읽고 플레이를 했다. 가장 기본적인 볼케르 장군의 귀환 시나리오를 했는데, 도시 발견 미션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다가 볼케르 장군이 먼저 도시를 발견하고 나니 우리 먼저 점령할 방법이 없어서 게임이 금방 끝나버렸다. 어쨌든 볼케르 장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룰은 대충 파악해서 그 다음에 다시 시도를 해봤다.

지난번의 패배를 거울삼아서 이번에는 마지막 코어타일을 우리가 잽싸게 열어서 볼케르 장군보다 도시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코어 타일이 그렇듯이 도시로 들어가는 것조차 난관이 많았는데, 내가 가는 길에는 용이 가로막고 있었고, 아내는 호수에 막혀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를 쓰고 간신히 용을 잡고 도시 앞에 도착하고 나니, 아내는 호수를 얼려서 길을 만들고는 따라 왔다. 사실 나도 상처를 너무 많이 입어서 도시를 한방에 점령할 수는 없었고, 그냥 아내를 호수 건너편으로 오게 만드는게 목적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전투에서 지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하는거였다. 뒤에는 호수가 있어서 돌아갈 수 없으면 다른곳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패널티만 더 입고 더 뒤로 후퇴를 해야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타일은 이미 깔려 있고 그 앞은 호수로 막혀 있어서 아내는 도시로 건너올 방법이 없는데, 맵 타일이 다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룰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한동안 긱을 뒤지다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기본 타일을 하나 더 깔고 그곳을 통해 아내가 넘어 왔다. 그래서 협공으로 도시는 간신히 함락했지만, 점령한 도시가 하필이면 흰색도시였다. 우리 둘은 오는 중간중간에 메이지 타워와 킵을 모두 점령하면서 왔기 때문에 이미 평판은 바닥을 찍고 있어서 도시에서 아무런 용병도 고용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껏 점령한 도시의 혜택은 하나도 못 받고 볼케르 장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진하고 있는데, 주사위 운이 지독히도 없어서 밤인데 주사위는 모두 골드라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 둘은 성 안에 갇혀서 카드만 줄창버리며 빨리 낮이 오기를 기도했다.

그러는 와중에 볼케르 장군이 도착했고, 성벽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부수고 우리 앞으로 도달했다. 기가막힌 타이밍에 날이 밝았고, 재정비를 마친 우리는 성벽 밖으로 나가 볼케르 장군을 맞이했다. 처음 맞이하는 볼케르 장군은 정말 무시무시한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내가 싸워야 할 적들은 하필이면 죄다 마비 능력을 갖고 있어서 막지 않고서는 도저히 싸울 방법이 나질 않았다. 다행히 내가 미리 고용해뒀던 영웅이 강력한 Cold fire block으로 볼케르 장군의 군대를 막아주고 그 사이에 나는 용 한마리를 처치해서 간신히 볼케르 장군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의 메이지 나이트는 무적이라 볼케르 장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까지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고 우리 둘 다 손에 강력한 아티팩트를 들고 있어서 싸워볼만했다. 보통 경쟁 모드에서는 아트팩트가 점수라서 아까워서 부수질 않는데, 협동모드에는 점수를 따질 필요가 없으니 아트팩트를 아낌없이 깨부수고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서 볼케르 장군을 간신히 무찌를 수 있었다. 아무리 메이지 나이트가 무적이라지만 혼자 몸빵을 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 카드가 30장이 넘었고 우리는 성벽에 주저 앉아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나리오를 마쳤다. 가장 기본 레벨에서도 이렇게 어려운데 도저히 볼케르 장군의 레벨을 올려서는 시도해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룰을 익히는 방법

최근에 보드게임을 접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룰 설명을 할 일이 있었다.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가진 못했지만 룰이 그렇게 복잡한 게임은 아니라서 적당히 설명하고 게임을 진행했다. 게임내에서도 텍스트는 하나도 없었고 아이콘만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콘만 보면 적당히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게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룰을 설명한 내가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룰을 이해하지 못해서 질문을 할 때도 ‘이 아이콘이 뭘 말하는거였죠?’ 라고 물어보면 좋았겠지만, 아예 아이콘을 읽을 생각도 못한듯이 자신이 현재 선택한 카드가 무슨 효과를 줄 수 있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자신의 플레이를 미리미리 계산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전략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그래서 깨달은건데, 보드게임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룰을 설명해주는게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일단 끝까지 들려줘도 집중하고 기억을 하질 못할뿐더러 기억하려는 의지도 크게 없어보인다. 이 사람들에게는 ‘일단 해보면 알겠지’ 라는 마인드가 더 강해서 일단 좌충우돌 아무거나 해보고 룰 마스터가 ‘이건 안됩니다’, ‘이걸 하면 이 효과가 나타납니다’ 라고 말해주고 나서야 룰을 조금씩 깨쳐나간다.

사실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익히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Trial and error. 일단 해보고 안되면 다른 방향으로 시도를 해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도 사실 비슷한 방법으로 자연 현상을 밝혀나간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해보고(Trial) 안되면(Error) 가설을 수정해서 다시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보드게임 문화는 이렇게 익히면 제대로 보드게임을 즐길 수가 없다는데 있다. 신작의 홍수 속에서 같은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질 않다보니 게임 룰을 익히는데만도 몇 번의 반복 플레이가 필요하면 그 게임 룰을 익히고 나면 더 이상 사람들이 그 게임을 하질 않는 것이다.

결국은 전략게임을 같이 할 사람들은 룰을 한 번 들어서 익히고, 룰을 다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내가 할 행동이 무슨 효과가 나타날지를 물어보는게 아니라 룰이 어떻게 될지를 물어봐서 그 룰로 인한 효과는 알아서 판단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덧셈을 배울 때 선생님한테 ‘1+1은 뭐에요? 1+2는요?’ 라고 물어보는게 아니라 ‘+는 뭘 하는 기호에요?’ 라고 물어봐서 1+1의 답은 스스로 찾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는 원래 좌충우돌 하면서 룰을 익혀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지, 경험해보지도 않고서 룰만 알려준다고  그걸 따라하는건 쉽지 않다. 그래서 수학이 그렇게 어려운 학문이고, 전략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건지도 모르겠다. 룰을 경험이 아닌 룰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걸까? 사실 나도 최근에는 룰을 설명하는 입장이었지, 내가 직접 룰을 듣고 게임을 해 본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도 룰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룰 설명이라는게 워낙 어려운 일이라서 룰을 잘 설명해줄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 어쩌면 전략 게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게 내가 룰 설명을 잘 못해서 일지도.

1일 1테포마

내가 최근에 보드게임을 너무 많이 사서 아내가 지쳤는지, 한 달에 한 게임만 새로 배우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래서 매달 할 게임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데, 1월에는 아를의 평원으로 시작했다. 보톡스에서 극찬을 해서 사실 기대를 많이하고 있었는데, 조금은 심심한 느낌이었다. 아그리콜라의 다양한 카드 조합과는 달리 모든 리플레이성을 몇 개의 건물에만 의존하는데 건물의 갯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다른 건물이 나왔다고 게임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는 느낌도 못 받았다. 2월의 게임은 트라야누스! 이것도 보톡스의 에퀴녹스님의 추천으로 샀고,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게임이다. 뉴욕에서 에퀴녹스님을 만나러 갔을 때 가지고 가서 엄청 재밌게 해서 기대를 잔뜩 안고 아내한테 설명해줬다. 안타깝게도 전형적인 슈테판 펠트의 게임답게 테마가 전혀 안 살아 있어서 아내가 그닥 재밌어하진 않았다. 1월, 2월 게임 모두 실패 후 3월의 게임은 무얼해야하나 고민하다가 테라포밍 마스를 골랐다. 사실 테포마를 계속 미뤄뒀던대는 이유가 있었다. 아내가 요즘은 아주 긴 게임은 좀 힘들어했는데, 테포마는 사람이 적어지면 오히려 게임이 약간 길어지는 이상한 게임이라서 선뜻 들이밀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 때문에 2인플을 추천하지 않아서 쉽게 들이밀기도 어려웠지만 다른 게임이 딱히 떠오르지가 않아서 일단 시작해봤다.

다행히도 대성공! 아내가 천문학을 좋아하기도 했고, 카드의 능력들이 테마가 잘 살아 있고 (난 거의 안 읽지만) 아내는 flavor text까지 다 읽으면서 엄청 좋아했다. 첫판 이후에 아내가 홀딱 반해서 거의 매일 밤 한 게임씩 했다. 초반에 몇 게임을 내리 이기더니 아내가 기고만장해져서 ‘이 게임을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임이야!’ 라면서 도발을 걸어왔다. 으으, 이대로 질 수는 없지! 왜 이렇게 많이 질까 고민을 하다가 얻은 결론은 카드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린다는거였다. 그래서 당장 깔 수 있는 카드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절제하면서 카드를 샀더니 부쩍 승률이 올라서 아내를 상당히 앞섰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한테 확장을 사라는 명도 받아서 비너스 넥스트까지 바로 추가하고 1일 1테포마를 계속 했다. 원래 비너스 넥스트를 추가하게 되면 금성까지 테라 포밍을 해야해서 게임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매 라운드마다 선 플레이어가 1가지 parameter를 그냥 올리게 되어 있는데, 아내는 그렇게 하면 게임을 하다마는 것 같다면서 그 룰도 없이 풀타임으로 게임을 하자고 했다. 분명 오래 걸리는걸 힘들어했었는데…

아내가 테포마를 좋아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승률이 앞서서 아내를 자극해버린게 문제였다. 난 다른 게임도 다양하게 즐기고 싶었으나 매일밤 테포마 승부를 걸어와서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치도록 테포마만 돌렸다. 이제 4월이 와서 4월의 게임을 시작해야하는데 테포마보다 재미가 없으면 안하겠다고 으름장을 놔서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테마성이 이렇게 잘 살아 있으면서 게임성도 좋은 게임은 찾기가 쉽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