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판데믹 레거시를 하고 있는데 멤버 중에 한 명이 내가 플레이어덱을 섞으니까 에피데믹 카드가 너무 빨리 나온다면서 나보고 똥손이라고 내가 섞지 말라고 한다. 일부러 에피데믹을 아래 넣지 않는 한 사실 누가 섞던 언제 나올지는 예측할 수가 없는 문제인데 내가 섞지 말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농담으로 듣고 그러려니 했다.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감염덱에서 무슨 카드가 나올지 대충 확률을 계산해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에 맞춰서 액션을 수행하고 예측에 맞게 나와서 기뻐하는건 좋은데, 예상하지 못했던 혹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카드가 나와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위의 멤버는 종종 ‘거봐! 내가 그거 나올 것 같다고 했잖아!’ 라면서 팀을 향해 약간의 비난 아닌 비난을 한다. 일단 그 카드가 나올 것 같다고 말한적도 없거니와 설사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럼 그에 맞춰서 액션을 하도록 유도를 해야지 카드가 나온 다음에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판데믹에서 큐브가 3개씩 쌓인 도시가 여러 개 있다면 그 중에 어떤 도시를 먼저 구할 것인가는 outbreak이 터졌을 때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내 액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서 정하는 것이지, 어떤 감염 카드가 먼저 나올지를 예측해서 행동을 하는건 그냥 찍기 게임과 다를바가 없다. 마치 주사위를 던진 다음에 ‘거봐! 내가 4가 나올거라고 했잖아!’라고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게임을 하다보면 주사위를 잘 굴리거나 카드를 잘 뽑는 사람에게 금손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그 반대의 사람에게는 똥손이라면서 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이것도 말도 안되는데 누군가가 그런 별명을 붙여주고 나면 확증편향이 생겨서 그런쪽 이벤트만 더 눈에 들어오게 되서 생기는 일일뿐이다. 보드게임을 ‘많이’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운이 없는 날과 운이 좋은 날이 사실 비슷하게 있다. 거기서 더 웃긴건 ‘네가 금손이니까 이번에는 네가 굴려봐!’ 또는 ‘네가 카드 뒤집어 봐!’라고 하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이야기하기 민망하지만 모든 주사위는 독립적이라 전에 잘 굴린거랑 지금 잘 굴리는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카드는 누가 뒤집던간에 이미 정해져 있다. 물론 농담처럼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내가 농담을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져서인지 별로 재미도 없고 짜증만 났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꽤 많은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하면서 어떤 확률에 ‘희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카드가 나올 확률이 더 높다거나 특정한 주사위 눈금이 나올 확률이 높다면 그걸 계산해서 다음 전략을 생각해보는건 의미가 있는 일일것이다. 예를 들어 간츠 숀 클레버에서 파란색 보너스를 얻었을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나올 확률이 적은 2, 12 등의 숫자를 지우는건 의미 있는 전략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높은 숫자가 나오길 바라면서 마지막 주사위로 주황색을 남기는건 그냥 도박이지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확률을 계산해서 높은 확률이 나오는 쪽으로 선택을 하는건 의미가 있지만 주사위 눈금처럼 정확히 나올 확률이 같은 이벤트에서 어떤 특정한 값에 기대를 갖는건 그냥 의미없는 찍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드게임에서 찍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어떤 값에 기대를 걸고 주사위를 굴렸을 때 그 눈금이 나온다면 그냥 심드렁하게 굴린 사람보다는 훨씬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반면에 그 눈금이 안 나왔을 때는 더 실망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실망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서 자연스럽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고를 하게 됐다. 그래서 주사위를 굴릴 때도 그냥 무슨 눈금이 나와야 나한테 좋을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고 일단 굴린다. 생각해봤자 그 눈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다 최근에 카지노에 가서 기대가 주는 희열과 실망을 제대로 느껴봤다. 룰렛에서 칩을 걸고 나니까 저절로 몸이 일으켜지면서 룰렛의 공이 어디로 가는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게 됐던 것이다. 이래서 가장 재밌는 게임은 돈 걸고 하는 게임이라는 말이 나오는거구나.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홀짝을 맞추는건데도 한판 한 판의 감정 기복이 엄청나서 몇 판 하고 나서는 긴장해서 손이 차갑게 식고 몸이 떨렸다 (고작 15불짜리 배팅이었다). 그래도 보드게임에서도 이렇게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6만을 바라보면서 주사위를 굴려야 하는 이클립스나 황혼의 투쟁보다는 굴린 다음에 무얼 가져갈까 고민을 하게 되는 간츠 숀 클레버가 나에게는 훨씬 재밌었다. 요즘 보드게임의 트렌드도 주사위의 어떤 눈금만을 기대하게 만들기 보다는 미리 확률을 계산해서 선택을 하게 하거나 이미 주사위를 던진 다음에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줘서 나에게 훨씬 잘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