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1일차

오늘은 정식으로는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지만 오리엔테이션이 있어서 내가 근무하는 랩이 아닌 회사 본부로 출근했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로망은 교수가 되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거였다. 물론 교수의 꿈은 이제 접었지만 어쨌든 첫 직장 출근이라 지하철을 타고 가고 싶었지만, 어디다 주차를 하고 무얼 타고 가야 오리엔테이션 장소에 늦지 않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차를 타고 출근을 했다. 사실 차를 타고 간 좀 더 중요한 동기는 그 전날에 보스턴에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다가 기차 타고 집에 왔는데 비용이 상당히 많이 나와서 차 타고 왔다 가는게 훨씬 싸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2시간 전쯤 출발하라는 룸메 할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2시간 전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저 게으른 자식 아직도 출발 안 했어? 어디 한번 보스턴 교통에 큰 코 다쳐보라지’라는 생각을 속으로만 하시고 입은 꾹 다물고 먼저 출근하셨다고 한다.) 서울만큼이야 하겠냐만은 출퇴근길 보스턴 교통도 만만치는 않아서 40분이면 가는 거리를 1시간 10분 걸려서 간신히 늦지 않고 도착했다.

내가 회사에 대해서 기대하는게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제 시간에 딱딱 시작할 줄 알았던 오리엔테이션은 나를 30분이나 로비에서 기다리게 만들고, 아무나랑 말 잘 주고 받는 미국답지 않게 많은 오리엔테이션 참석자들이 침묵 속에 스마트폰만 쳐다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첫 순서는 사진 촬영. 웃으라는 말에 이빨은 보이면 안될 것 같아서 입꼬리를 한껏 치켜들려고 시도했으나 정작 입꼬리는 안 올라가고 얼굴에 힘만 잔뜩 들어간 채로 사진이 찍혀서 나왔다.

오리엔테이션 스케쥴을 나눠주는데 제일 눈에 띄었던건 ‘laptop give away.’ 노트북을 공짜로 준단 말이야?? 역시 회사가 좋긴 좋구나. 안타깝게도 무식하게 생긴 레노버 노트북을 지급 받았지만 그래도 공짜가 어디냐! 오랜만에 윈도우 노트북을 다시 받아서 이걸 게이밍 노트북으로 써볼까 하는 망상을 잠시 가졌으나 나에게는 프로그램을 깔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었다.

발표를 강조하는 나라 미국. 그리고 그게 더 중요한 회사 정도되면 오리엔테이션에서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대부분 평범한 수준의 PPT와 그에 걸맞는 텍스트를 그냥 읽는 수준의 오리엔테이션을 지겨움을 참아내며 간신히 들었다. 역시 가장 중요한건 휴가!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바로 출근한다는 일반 다른 회사들과 달리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는 회사가 문을 닫아서 다른 곳보다 5일의 휴가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근속년수에 따라 휴가가 올라가는데, 2년 계약직인 나는 해당사항이 없겠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건 역시 밥! 카페테리아에서 아무거나 적당히 먹으라고 15불 바우쳐를 줬다. Wholefood에서 팔 것 같은 작은 스시 메뉴부터, 다양한 샐러드 바, 햄버거나 피자 등 작지만 알차게 구성이 잘 되어 있었다. 아침에 오리엔테이션할 때는 공짜로 주던 물병도 카페테리아에 오면 돈을 받고 팔아서 당황하긴 해지만. 내 옆의 어떤 중국인이 어떻게 하면 15불을 알차게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길래 나만 그런 고민을 하는게 아니라서 조금 안심이 됐다. 롤 하나와 샐러드바에서 간단하게 담고 계산하니 ’$15.25입니다’ 라고 알려줬다. 거의 정확하게 맞췄군 킥킥. 공짜는 낭비하면 안되지.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한국분에게 연락을 드려서 잠시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가장 인상에 남았던건 oncology department의 장이 최근에 CRISPR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분야 사람들이 많이 채용됐다는거다. 나 같은 평범한 이력서를 가진 사람이 대체 어떻게 여기 뽑혀왔나 싶었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뽑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인생이 운에 의해서 많이 바뀔 수 있다는걸 받아들이는편이고, 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운의 총량이 정해져있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기 때문에 운이 좋아서 뽑히면 그냥 그대로 즐길 줄 안다. 대학교 때도 그랬고, 취직도 운이 좋아서 상대적으로 쉽게 들어 간 것 같다.

출근길과 마찬가지로 퇴근길도 여전히 막혀서, 스마트폰을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팟캐스트를 느긋하게 들으면서 집에 돌아왔다. 내 이전 차는 일본 차 주제에 아이폰만 블루투스 연결을 지원해서 매번 이어폰 꼽고 들었는데 카 오디오로 팟캐스트 들으니까 퇴근길도 금방 가는 것 같다.

2 thoughts on “출근 1일차

  1. : ) 전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간다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더 팍팍 받으시길 ㅋㅋㅋ
    $15.25, 25센트나 초과하시다니, ㅋㅋ 기름 넣으실 땐 $15.00 맞추는 금손으로….ㅋㅋ
    출퇴근길에 팟캐스트는 신의 한수입니다. 오가는 길이 즐거워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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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즘은 출퇴근 길이 짧아져서 팟캐스트 들을 일도 없어지네요. 25센트 초과가, 남는 바우쳐 버리는 것 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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