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05 미국인 보드게임 모임

보스턴 와서 처음으로 미국인 보드게임 모임에 나가봤다. Meetup에 모임이 많긴 했지만 의외로 대부분 모임이 평일에 있어서 못 나가다가 일요일 저녁 모임이 있길래 큰맘 먹고 한번 나가봤다. 평상시에는 매직 더 게더링 모임으로 북적북적하는 곳이었는데, 일요일 저녁이라서 그런지 한산했다. 매직하던 자리에 보드게임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할 것을 상상했으나 지나친 상상이었고 테이블은 대부분 비어 있어서 괜히 일찍 온 나는 게임들을 구경하면서 어슬렁거렸다.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친구 한명이 테이블에 에볼루션을 올려놓고 옆에 사람들과 잡담을 하길래, ‘옳지! 저기가 보드 게임 모임인가보구나!’ 하고 얼른 가서 자리에 앉아서 자기 소개를 했다. 게임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요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나는 낄자리가 없이 멀뚱멀뚱히 앉아 있었다.

3명 정도는 보드게임을 많이 아는 사람이었고, 그 외에는 나와 보드게임을 처음 접해보는 2명이 더 추가되서 6명이 되자 테이블 가운데 놓여있던 에볼루션을 시작했다. 기본판 밖에 못해봤는데, 무려 기후 확장에 프로모 팩까지 추가해서 게임을 시작했다. 오호! 기후 확장을 처음 해보는구나. 특이했던건 초록색 프로모 보드였는데, 다른 공룡들과 달리 개체수와 개체 크기가 1개의 큐브로 조정되어서, 훨씬 개체수를 올리기가 쉬웠다. 대신에 많이 먹진 않아서 그걸로 밸런스를 어느정도 조정한 걸로 보였다. 기후가 적당히 따뜻해지니 음식이 풍족해져서 나는 방어 특질을 덕지덕지 붙이고 열심히 음식을 모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나는 처음 보는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육식 동물들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안 잡아 먹으면 좋지 뭐. 열심히 음식을 모았는데, 기후가 점점 더 더워지더니 내 동물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멸종 위기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한 명만 위풍 당당하게 서 있었다. 프로모 보드를 level 7까지 올렸는데, 기후에는 개체 크기가 6인 종까지만 영향을 받는다고 되어 있어서 자신은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게임이 그렇게 설계됐을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긱을 조금 찾아보다가 말아서 나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역시 아무도 나는 건드리지 않아서 적당히 음식을 모았지만 멸종하지 않는 level7짜리 개체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게임은 패배했다. 너무 이상해서 집에 와서 룰북을 찾아보니 충격적인 에러플이었다. 애초에 초록색 프로모 보드는 공룡도 아니었고, 따라서 개체수, 개체 크기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미국인들이다. 대체 어떻게 룰북을 읽으면 이런 플레이가 가능하지?

초보들이 끼여 있어서 그 다음으로는 7원더스를 진행했다. 이미 게임을 잘 알고 있는 4인은 카드를 보고 휙휙 넘겨서 ‘아, 7원더스는 이렇게 해야하는거구나’ 하고 게임의 참 재미를 느끼려는 찰나 초보 둘이 끼어 있어서 결국은 한턴 한턴이 느릿느릿진행됐다. 원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질 못해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게임을 잘 끝냈는데, 점수를 계산할 때 다시 한 번 충격이 왔다. 내 이름을 기억 못하는건 당연한데, 점수 계산할 때 다른 사람은 이름을 적어 놓고 내 자리는 빈칸으로 놔두는 것이었다(…) 이름 다시 물어보는게 그렇게 어렵나? 사실 미국 와서 대부분 친절한 사람들만 만나다보니 이름도 다시 안 물어보는 미국인은 충격적이었다. 하긴, 보드게임하러 오는 동양인은 본적이 거의 없어서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게임을 고르면서 내가 가져간 가벼운 카드 게임인 isle of trains를 꺼내봤으니 가볍게 묵살당하고, quadropolis라는 게임을 배웠다. 물론 이미 기분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quadropolis는 꽤 재밌는 게임이었고,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심각한 에러플과 불친절한 사람들, 썰렁한 테이블 덕분에 매우 안 좋은 인상만 남기고 모임을 마치고 말았다. 그래도 게임을 계속 하려면 몇 번은 더 나가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당장은 한국인들을 모으는 방법이 거의 없어보이고, 나는 게임이 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익숙해지면 그 사람들도 나를 좀 더 편하게는 대하지 않으려나? 그러고 보면 나는 보드게임이 하고 싶은거지 딱히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는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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