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03 미국인 보드게임 모임

보스턴에서 처음 갔었던 미국인 보드게임 모임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집에서 너무 할일이 없어서 빈둥대다가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약간은 인종차별을 받는 것 같았지만, 얼굴이 익숙해지고 게임을 좋아한다는걸 알면 그것도 덜하리라 믿으며.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전에 게임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몇명 보여서 인사를 했는데, 나를 별로 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런곳에서 동양인 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날 기억 못하나? 뭐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남들이 기억하는 것보다 자신이 더 많이 기억되고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기억 좀 못해도 상관은 없다. 전에도 느낀거지만 여기 사람들은 게임 고르는데 참 우유부단하다. 사실 누가 몇시에 올지 전혀 모르니 그러는 것 같지만. 어쨌든 사람이 더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Stroop이라는 간단한 카드게임으로 모임을 시작했다. 게임에 대한 인상은,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Set정도? 실시간 게임은 아주 예전에 할리갈리와 Pit 이후로 처음 해보는데 단순히 순발력만 좋으면 되는게 아니라 언어를 인지하는 능력도 탁월해야해서 이전에 해본 실시간 게임들보다 훨씬 재밌었다. Set의 단점은 게임이 조용조용 진행된다는 점인데, 이건 스피드 게임이라 좀 더 파티스럽게 진행이 됐다. 단점이라면 계속 카드를 내다보니까 중간에 잘못내도 확인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첫 게임을 끝내고 다음 게임을 고르는데, 다들 어영부영하고 있길래 Isle of Skye를 하자고 제안했다. 뜨뜻미지근한 반응들. 그래도 이전에 기차섬을 내밀었을 때는 아예 관심이 없었는데 Isle of Skye는 플레이라도 해주니 그나마 다행인건가. 문제는 내가 제안을 하는 바람에 내가 설명을 해야 했다는 것 ㅠ.ㅠ 설명자체는 잘 할 자신 있고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건 미리 준비를 했을 때고 한글로 설명할 때만 그랬다. 게임 자체는 간단했지만 영어로 설명하려니 단어를 제대로 몰라서 우왕좌왕하며 간신히 게임을 시작했다. 다행히 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라서 내 엉망인 설명으로도 게임 자체는 금방이해하고 플레이를 했다. 아뿔싸! 게임하다 중간에 스코어 보드판을 잘못 썼다는걸 깨달았다. 이러면 선이 공평하게 돌아가질 않는데 ㅠ.ㅠ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아서(전 모임의 에러플을 생각하면 이건 양호하긴 하다), 적당히 게임은 진행했는데 여전히 뜨뜻 미지근한 반응으로 게임의 본질인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난 사실 보드게임을 하면서도 시스템에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데서 가장 큰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누군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게임에서는 내가 이기고 있어도 그닥 즐겁다는 생각이 들질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점수를 확인하는데, 누가 이겼는지도 확인안하고 그냥 자기 점수만 다 내고는 먼저 일어나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이건 좀 충격적인걸.

Isle of Skye가 끝나고 몇 명이 더 왔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다음 게임을 고를 줄 알았는데, 모임 주관자가 멀뚱히 새 게임만 구경하고 있었고, 새로 온 사람 중에 할머니 한명이 내 옆에 앉더니 자꾸 나보고 2인플 푸에르토 리코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모임 주관자를 버리고 게임을 하기에는 약간 마음이 쓰여서 좀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게임할 생각을 안해서 물어보러 갔더니 누군가 올 수도 있다고 기다리는 중이란다. 이미 이 사람들한테서 그런걸 미리 말해주기를 기대하는건 무리라는걸 알았기 때문에 같이 멀뚱히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사람이 안와서 결국 같이 게임을 하기로 했다. 5인플 게임을 골라야 하는데, 여전히 무슨 게임을 할지 모르고 이리저리 방황만 하다가 결국 2:3으로 갈라지잔다. 난 게임하러 왔지 빈둥대러 온게 아니기 때문에 할머니를 붙잡고 푸에르토 리코 2인플을 하기로 했다. 푸에르토 리코 특유의 귀찮은 세팅이 끝난 후 게임을 시작했는데, 우와! 이 할머니 게임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그래도 나는 옥수수를 꾸준히 선적하면서 점수를 계속 벌고 있었고 할머니는 하나도 못 싣고 있어서 내가 이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small market, large market, office로 콤보를 꾸리더니 고작 indigo하나씩을 팔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쓸어모아서는 대형 건물을 여러 개 사들여서 순식간에 게임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래도 건물만 짓다보면 대형건물에서 주는 추가 보너스를 받기 쉽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길 줄 알았으나 3점차이로 패배 ㅠ.ㅠ 푸에르토 리코 2인플 스피드게임으로 하는 할머니라니. 미국에서도 보드게임은 비디오게임에 비해서는 마이너 장르일텐데도 이런 할머니가 있다니 신기했다. 그 다음 게임으로 할머니는 워터딥의 군주 2인플, 아그리콜라 패밀리 룰 2인플을 제안했으나 둘 다 내가 하고 싶지가 않아서 버건디의 성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나름 룰 설명 잘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은 끝까지 굴욕의 룰설명이었다. 일단 영어로 하는 설명이라서 막힌걸 제외하더라고, 설명 순서도 엉망이고 빼 먹은 것도 많고 할머니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채로 게임을 진행해야했다. 내가 룰 설명이 엉망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푸에르토 리코를 그렇게 빨리 하던 할머니가 계속 장고를 하시고 똑같은 룰도 무척 여러번씩 반복해야했다. 그러다가 매장 문을 닫는 시간이 다가와서 그만 접었는데, 중간에 게임을 접은게 다행으로 느껴지는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할 게임을 미리 알아놓고 룰북을 철저히 숙지하고 설명하는 시뮬레이션도 머리에 그려봐서 그런지, 내가 아무리 잘 알고 있는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미리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의 설명은 정말 어렵다는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영어로 설명을 자주하면 영어 실력이 조금은 늘지 않을까라는 망상도 해보면서 여전히 실망스러웠던 미국인 모임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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