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 2박3일 뉴욕 보드게임 모임(1)

학위 과정을 하면서 보드게임 팟캐스트인 보톡스를 엄청 열심히 들었었다.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받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됐고, 보드게임을 취미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 에피소드마다 투고를 보내면서 진행자들과 간접 소통도 하고, 상품으로 게임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보톡스 진행자이신 에퀴녹스님께서 미국 동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애청자로써 만나보고 싶었는데, 미국에 오신후로 친히 연락을 주셔서 만나보기로 했다. 보드게임이 모두 텍사스에 있어서 부랴부랴 쇼핑몰을 뒤져서 3인플(에퀴녹스님에게 동행도 한 명 있었다) 할만한 게임들을 찾아보고 에퀴녹스님의 추천도 받아서 이 핑계로 컬렉션을 좀 더 늘렸다. 아뿔싸! 나한테는 이 많은 보드게임들을 가져갈 가방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내 기내용 캐리어는 보드게임을 넣기에는 너무 작았다. 패닉에 빠져서 우왕좌왕하다가 보드게임 가방을 하나 지를까하고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너무 비쌌다. 문득 생각난 룸메이트 할머니에게 SOS를 치니 흔쾌히 캐리어를 빌려주셨다. 여전히 내 성에 안차게 작았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있는게 어디냐! 캐리어에 넣을 수 있는만큼 가득가득 채워서 뉴욕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나서 보드게임을 하려고 뉴욕까지 가다니. 내가 미쳤구나. 하지만 그만큼 보톡스는 내 박사과정 생활에 떼어놓을 수 없는 큰 부분이었고 패널 한분 한분 다 마음에 들어서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에 약간의 모험을 해봤다. 그리고 친구랑 계산해봤는데, 보스턴-뉴욕은 서울-부산보다는 짧았다. 충분히 보드게임하러 갈만한 거리였다(…) 당일치기도 아니고 2박3일인데 그정도는 가깝지. 암.

보스턴에서 출발할 때 버스 출발 시간을 착각해서 눈 앞에 뉴욕행 버스를 놔두고 태연히 터미널에 앉아 있다가 표를 뒤늦게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간신히 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와이파이가 된다는 버스는 와이파이는 잡히지만 인터넷은 안되는 만행을 보여줘서 내 폰에 저장되어 있는 보톡스를 들으며 4시간을 훌쩍 보냈다. 역시 장거리 여행에는 팟캐스트가 최고지. 보스턴에서도 손을 밖에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는데 도착한 뉴욕도 어마어마한 추위로 나를 반겨줬다. 하지만 무려 에퀴녹스님과 보드게임을 하러 가는데 이정도 추위쯤이야! 숙소에 도착하니 영상으로 잠시 모습을 확인했던 에퀴녹스님이 반겨주셨다. 예상했던 것처럼 에퀴녹스님의 동행은 여성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미모의 여성분이라는 것만 적어두자.

나를 기다리느라고 10시가 넘어서도 저녁을 못 드시고 계셨던 두 분이 해주신 떡볶이를 냠냠 맛있게 먹고 밤이 늦었지만 보드게이머가 모였는데 게임도 없이 첫날 밤을 잘 수 없어서 가벼운 카드게임인 기차섬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에퀴녹스님과 둘이서 치열하게 1등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게임이 끝나고 보니 이긴건 여성분(…) 게임을 잘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이렇게 끝날 줄이야. 하지만 이는 나의 2박 3일간의 처참한 보드게임 성적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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